2주일 동안 공전된 국회가 다시 문을 열려 하고 있다. 560개가 넘는 법안과 208조원이 넘는 예산안, 그리고 이라크 파병기간 연장동의안 등 중요한 국정현안을 내팽개쳐 둔 채 거듭돼온 파행이었다."진심으로 사의를 표한다"는 말 한 마디가 하기 싫어 들끓는 여론을 무시해 온 총리의 태도는 무책임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국민이 바라는 총리의 역할은 열린우리당 중진 의원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다. 민생과 국익을 책임져야 할 행정부 수장으로서의 막중한 역할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수많은 민생 법안과 동의안, 그리고 방대한 내년도 예산안들의 원만한 처리가 민생과 국익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총리가 모를 리 만무하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지난 6개월 동안 형편없이 급락했고, 이처럼 낮은 지지율로는 아무리 훌륭한 정책과 야심찬 개혁도 제대로 추진력을 얻기 쉽지 않다는 것 역시 잘 알 것이다. 총리의 언행은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만 증폭시켰을 뿐이다.
분권형 국정운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총리에게 책임과 권한을 실어 준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가 총리로 하여금 정치적 발언을 통해 정국의 돌파구를 여는 데 앞장 서 달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민 역시 정치적인 총리를 바라지 않는다. 대통령의 부족한 면을 가려 주고 보완하면서 국정을 원만히 이끌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진정한 책임총리의 모습을 원한다.
이번 사태는 우리 국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병폐를 그대로 드러냈다. 지난 선거를 통해 무려 60%가 넘는 국회 의석이 초선의원들로 채워졌다. 이들 대부분은 의욕적으로 국정을 따지고 예산과 법안을 심의할 준비를 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오히려 이들의 의정활동을 제대로 이끌어 주었어야 할 다선의 선배의원들이었다.
정기국회 초기부터 국정감사를 정쟁의 장으로 변모시키고 여야 간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킨 의원들은 대부분 3선 이상의 중진 의원들이었다. 이번 국회 파행을 주도하고 또 조속한 정상화를 가로막아 온 여야 의원들 역시 대체로 중진 의원들이었다.
사실 중진의원일수록 국회 출석률이 떨어지고 법안 발의빈도도 낮아진다는 것은 의정활동을 감시해 온 시민단체들의 조사를 통해 매년 확인돼 왔다. 국회 경력이 쌓일수록 국정에 대한 경륜이 높아지고 정책에 대한 전문성과 식견이 높아질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을 한국의 중진 국회의원들은 보기 좋게 깨뜨리고 있다. 정치경력이 쌓인 만큼 늘어난 상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 그리고 감정과 아집이 이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할 뿐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초선의원 당선비율이 한국처럼 높은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것은 한국 유권자들이 유별나게 변덕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국회 경력이 쌓일수록 무책임해지고 무능해지는 한국 국회의원들 때문이다.
이제 국회는 불과 한 달 남은 정기국회 회기 동안 예산안을 심의하고 수많은 민생관련 법안들을 처리해야 한다. 예산안은 12월2일까지 통과되어야 한다. 발의된 법안들은 통과되기까지 최소 15일 이상의 심의기간을 거쳐야 한다. 이 모두 무더기 졸속 처리라는 과거의 전철을 회피하기 힘든 상황이 돼 버렸다. 여기에 여당이 통과를 공언하고 또 야당이 극력 저지를 선언한 소위 4대 개혁 법안들이 버티고 있다.
지난 2주 동안 국회를 열지 않는다고 많은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앞으로 한 달 동안 국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또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 듯하다. 지난 총선을 전후해서 모든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다짐했던 상생의 정치는 여전히 요원한 것이 한국 정치의 서글픈 현주소다.
/김수진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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