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를 읽는 독자들은 정보산업을 한다는 게 마치 작은 배를 타고 험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것과 같다고 느꼈으리라 믿는다. 순풍을 만나 기분 좋게 날 듯 항해하는 때가 있는 가 하면 폭풍에 모진 시련을 겪는 일이 수없이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항해 중 순풍과 역풍을 드라마틱하게 경험한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두루넷이다.1999년 11월 두루넷은 한국 최초의 나스닥 상장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두루넷 회장인 나는 김종필 총리를 비롯한 귀빈 앞에서 인사말을 했다.
"전 세계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꿈은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는 일이다. 미국 기업들은 나스닥에 상장하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박수 갈채를 받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랬고, 야후도 그랬다. 미국 이외의 기업들도 나스닥 상장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여러 회사들이 이를 통해 성공했고, 인도 회사들도 나스닥에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아직까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 두루넷이 이 일을 이뤄냈다. 이는 우리 두루넷 만의 기쁨이 아니라 한국의 기쁨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공을 본받아 수많은 벤처 기업들이 용기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두루넷의 나스닥 상장은 당시 우리나라 매스컴에서도 대단한 화제거리로 다뤘다. 나스닥 상장 후 두루넷의 주식은 급등했다. 한 주식의 가격에다 주식수를 곱하면 그 회사의 시장가격이 나오는데, 당시 두루넷의 시장가격은 현대자동차보다도 높았다. 두루넷은 당시 사원들에게 스톡옵션을 주었기 때문에 모든 사원이 부자가 됐다. 평사원도 자기 주식이 아파트 한 채 값에 이르게 됐다. 그야말로 한국에서 한 기업의 모든 사원이 부자가 되는 엄청난 일대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당시 두루넷은 스톡옵션을 가진 사원 외에도 수많은 주주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대박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던 두루넷이 4년도 안 된 2003년 3월 법정관리로 가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과정을 온몸으로 직접 겪었다. 이 일은 기가 막히게 신나고, 억장이 무너지게 억울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자초지종에 앞서 우선 두루넷이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설명하겠다. 82년 나는 데이타통신㈜ 사장을 맡으면서 한국 최초로 패킷 교환방식에 의한 컴퓨터 통신을 도입했다. 패킷 교환 방식은 기존의 회선 교환방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술이다. 이 방식은 회선 교환 방식에 비해 통신 선로의 이용 효과가 수백 배에 달하고 교환시설의 값은 수백 분의 일로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컴퓨터와 컴퓨터 사이의 통신을 매개하는 데이터통신(컴퓨터 통신)은 처음부터 이 방식을 채택했다. 데이터통신이 가장 발달한 방법은 인터넷이다. 인터넷 통신의 값이 엄청나게 저렴한 것은 이러한 통신 방식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저속도와 고속도 인터넷으로 구별된다. 저속도는 과거 독자 여러분이 전화 회선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던 방식이다. 그 통신 속도는 2,400bps(bps는 1초에 보내는 신호의 수)에 불과하다. 반면 고속은 처음부터 끝까지 패킷 교환 방식을 이용하므로 그 속도가 100만bps 또는 1,000만bps에 달한다. 빠르기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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