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장도 얘기 거리가 풍성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크게 성공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소텍(Sotec)은 일본에서 노트북을 디자인하고 소량이나마 생산, 판매하는 회사였다. 1998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소텍의 오베 소이치(大邊創一) 사장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홍순 사장이 그와 접촉했다. 삼보는 미국 시장에서 ‘이머신즈’라는 자회사를 세워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나라인 만큼 일본인과 합작하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이었다.
오랫동안 PC 업계에 종사, 발이 넓은 오베 사장은 파트너로 제격이었다. 결국 삼보와 소텍은 서로 협력하면 윈윈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소텍은 일본의 네트워크를 활용, 사업을 전개한다는 전략을 짰다. 삼보는 소텍의 지분 28%를 확보, 2대 주주가 됐다.
삼보는 당시 일본에서 10만엔(약 800 달러)대 PC만 내놓으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에서는 똑 같은 모델이 500 달러 미만에 팔리고 있던 때다. 당연히 수익률도 만족할 만 했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일본 시장 점유율이 치솟아 소비자 시장에서 3위까지 갔다. IBM, 소니, 도시바를 물리치고 NEC와 후지츠에 이어 빅3 반열에 올랐다.
하이테크 분야에서 한국 제품이 일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소텍은 주요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냈다. 매스컴도 격찬할 만큼 놀라운 기업으로 발전했다. 이윽고 2000년 9월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돼 우리는 큰 이익을 남겼다.
성공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 경쟁 업체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저가의 컴퓨터를 대량 판매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우리는 소텍과 몇 가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중 하나는 오디오비디오PC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때도 정 철 박사가 나섰다. 일본에서는 신제품이 나오면 무조건 사주는 마니아가 10만 명 정도 있다. 이들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신기한 제품을 만들기만 하면 10만대는 판매가 보장되니 제품 개발자에겐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는 산수이, 아카이, 빅타 처럼 오디오비디오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전문 기업이 수두룩했다. 이들 기업과 협력해 오디오·비디오시스템, PC를 각각 따로 살 게 아니라 한 개만 구입하면 모든 성능을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키로 했다. 이게 바로 오디오비디오PC였다.
두 번째는 키친PC다. 주부들은 보통 부엌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한다. 키친PC는 주부들이 라디오 대신 간편히 옮겨 놓을 수 있는 가벼운 PC를 만들어 라디오도 듣고 TV도 보고 인터넷을 즐길 수 있게 하자는 게 컨셉이었다.
이들 제품은 설계와 디자인 면에서 보면 뛰어났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앞서 시장이 따라와 주지 못해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마니아들은 격찬하고 사주었으나 대중화에는 이르지 못 한 까닭이다. 그 뒤 오베 사장은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고가와 저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스템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만에서 여러 종류의 컴퓨터를 동시에 도입했다. 삼보와의 1대 1 협력관계를 깨버린 것이다. 그러자 소텍의 영업 실적은 급격히 떨어졌다. 삼보도 소텍의 주식을 팔고 결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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