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난 나만이 즐길 수 있는 나의 천국을 만들 수밖에. 내 머리 위에 왕관이 놓이기 전까지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 생각하겠다. 나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에게 달콤한 미소를 지어보일 수도 있다."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포착하기로 정평이 난 연출가 한태숙이 ‘관객들 내면의 악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정의한, 리차드 3세가 무대에서 내뱉는 대사는 어둡다. 왕위 쟁탈전이 치열한 15세기 영국 장미전쟁시대에 실존한 그는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와 조카를 죽이는 정신적 불구자다. 천부적으로 곱사등에 비틀린 왼팔을 타고난 외모는 그의 불구를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도 될 듯하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5일 막을 올린 ‘꼽추, 리차드 3세’는 인간내면에 꿈틀거리는 악을 형상화한 시각적 이미지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다양한 오브제와 탐미적 무대연출로 알려진 한태숙과 지난해 ‘보이체크’로 호평 받은 러시아 무대미술가 알렉산드르 쉬시킨의 공조로 이뤄낸 무대는 인상적이다. 3각으로 삐죽하게 객석을 침범해 들어와 앞뒤 길이 30m에 이르는 무대 왼편에는 성벽 같은 벽 구조물이 버티고 서있다. 장과 막으로 장면을 구분하는 대신 무대 자체가 갖는 거리감을 활용해 무대의 앞 뒤에서 상황을 발생시키며 압축적으로 극을 진행시킨다.
단조로워 보이지만 상징적인 무대와 오브제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다. 벽체는 런던 탑으로도, 문과 창문으로도,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로도 활용되고, 무대에서는 변칙적으로 상자구조물이 튀어나온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리차드 3세에게 ‘천국’을 선사한 옥좌는 다리가 3개 뿐으로 균형을 잡고 있어도 언제나 위태로워 보인다. 가느다란 줄에 무게를 지탱하며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거울도 뒤틀린 리차드 3세의 절망과 죽음을 예고하는 독백과 함께 왜곡된 그의 생을 형상화한다.
오른쪽 다리로만 몸을 지탱하느라 통증이 엄청나다던 배우 안석환은 드넓은 무대를 꽉 채우는 듯한 느낌으로 결코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 악인 리차드 3세를 연기했다. 그에게 남편과 자식의 목숨을 빼앗기는 엘리자베스 역의 고수민 등 조연들도 충실했다. 무대 깊숙한 곳에서 연기할 때는 객석까지 대사가 전달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배우들이 토해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상투적이지 않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28일까지.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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