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드라마 공화국이다. 대한민국 TV의 권력은 드라마로부터 나온다.’10위 안에 8개 드라마가 포진한 지난주 시청률 순위를 보면 한국 사람들의 드라마 중독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1년 내내 양산되는 수많은 드라마가 전부 다 뜨는 건 아니다. 수십 억원의 제작비, 호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5% 이하 시청률로 처절하게 실패하는가 하면,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대박을 터뜨린다. 요즘 ‘되는 드라마’를 살펴보면 몇 가지 공식이 눈에 띈다.
올해 성공한 드라마들은 한결같이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거나, 여성들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다뤘다.
여성 영웅을 전면에 내세운 MBC ‘대장금’이 그랬고, 30대 독신 여성들의 삶을 실감나게 그린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그랬다. 맞바람을 피운 금파, 동거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은파 자매 이야기를 담은 KBS2 ‘애정의 조건’, 남편의 불륜으로 급작스럽게 이혼한 가정주부 미영의 성공기인 ‘두번째 프러포즈’도 같은 계열의 드라마. 30대 기혼 여성들이 겪는 성(性)과 결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SBS ‘아내의 반란’도 마찬가지다.
반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미륵세상을 꿈꿨던 장길산(SBS ‘장길산’)이나 한강의 기적의 주역인 정주영(MBC ‘영웅시대’의 천태산) 같은 남성 영웅들이 쏟아내는 거대 담론은 외면 당했다.
여성들이 당당한 삶의 주체로서 결혼, 이혼, 사회적 성공 같은 현실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작지만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모았다.
재벌 2세에게 선택 받은 신데렐라 이야기는 한국 드라마의 고전. 모든 걸 갖췄으면서도 "사랑 밖엔 난 몰라"라고 외치는 왕자님과 그를 향해 순정을 불태우는 신데렐라, 그리고 그들을 방해하는 악한 남녀가 빚어내는 갈등은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은 이런 공식을 깨며 새로운 트렌디 드라마의 출현을 알렸다. 계급의 차이와 이로 인한 모순을 까발린 ‘발리…’는 돈 많은 남자와 사랑하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캔디를 내세워 왕자-신데렐라 이야기를 전복시켰다. 5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파리의 연인’은 재벌 2세란 흔해 빠진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신데렐라의 신분상승담에서 오로지 멋있는 조연 역만 해왔던 ‘왕자’를 사랑하며 갈등하는 ‘인간’으로 격상시켰다.
그런가 하면 MBC ‘불새’는 원래 부잣집 딸이었다가 몰락한 여자와 고학생에서 자수성가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에 재벌 2세 정민과 사이코 미란을 끼어넣는 변칙적 기법을 구사했고, KBS2 ‘오! 필승 봉순영’도 거지에서 왕자로 인생역전한 필승과 그에게 구원 받는 순영을 대입한 색다른 신데렐라 스토리를 전개했다. 트렌디 드라마의 진화가 시작된 셈이다.
뜨는 드라마의 또 다른 성공 코드는 코믹이다. 초등학교 동창에게 자신의 치질치료를 맡기는 여자(‘결혼하고 싶은 여자’)와 졸지에 종가집 종부가 된 철부지 여고생(KBS2 ‘낭랑 18세’), 못생긴 뚱보에서 미인으로 거듭난 전직 투포환 선수(KBS2 ‘백설공주’)가 출현했다. 그런가 하면, 10억원을 벌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커플(SBS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과 하루라도 다투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동거 커플(KBS2 ‘풀하우스’)도 있었다.
불륜과 이혼, 복수라는 무겁고 칙칙한 소재를 코믹으로 포장해 경쾌하게 풀어가는 드라마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혼한 여성의 삶을 다루기에 앞서 아줌마 장미영의 유난스럽고 억척스러운 생활기를 코믹하게 그린 ‘두번째 프러포즈’, 가정주부의 불륜이란 소재를 중화하기 위해 푼수 아줌마 오영심을 전면에 내세운 MBC ‘12월의 열대야’가 그렇다. 8일 첫 방송한 KBS2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입양아 무혁의 복수극이지만, 명랑 드라마의 공식을 차용한다.
과거에는 통했지만 요즘에는 통 안 먹히는 코드도 있다. ‘첫사랑’이다. 윤석호 PD의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 시리즈를 통해 한때 절정에 올랐던 첫사랑 신화는 그 빛을 잃었다. SBS ‘첫사랑’, KBS2 ‘4월의 키스’의 실패에 이어, 현재 방송중인 SBS ‘남자가 사랑할 때’도 관심 밖이다. 사랑은 ‘운명적이고 영원불변한 무엇’이 아니라, ‘부딪치고 갈등하며 일궈가는 삶의 한 과정’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 아닐까.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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