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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정상회담 장소 가고시마 논란/ 정부 또 ‘역사 무신경’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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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정상회담 장소 가고시마 논란/ 정부 또 ‘역사 무신경’ 드러내

입력
2004.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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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17일부터 이틀동안 열리는 한일정상회담 개최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가 별다른 생각 없이 일본측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 선정된 정상회담 개최장소가 1870년대 한반도 무력점령을 주창했던 ‘정한론(征韓論)’의 거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의 근거지였던 가고시마(鹿兒島)라는 점이 주된 이유다.정부는 지난 7월 제주도 한일정상회담 당시 12월 중 일본 휴양지에서 실무형 정상회담을 개최키로 합의했다. 일본은 이후 회담장소로 온천휴양지인 가고시마를 제시했고 정부는 이에 동의, 10월 초 청와대에서는 회담일정과 장소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0월 말에는 정부 관계자들이 현지 답사까지 다녀왔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주 초. 현지 답사 결과 가고시마 인근에 정한파 군인, 정치가들의 동상과 역사박물관, 가미카제 출격 기지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정부의 고민이 시작됐고 이 내용이 한 국내 언론에 보도된 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도 "장소변경을 검토 중인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마치무라 노부다카 일본 외무장관이 5일 "외교적으로 한 번 결정된 것을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정부만 체면을 구기게 됐다. 결국 정상회담 장소 변경문제를 논의하겠다던 정부는 6일 서울에서 열린 양국 외무장관회담에서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으로도 일단 회담 주최국가가 회담 장소를 정하는 관례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정부 당국자는 이후 "실무형 회담이기 때문에 회담장소 변경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상회담의 모양새가 이상해졌다는 비판은 면치 못하게 됐다.

이 같은 논란이 불거지자 일부 학계 인사와 시민단체는 정부의 한심한 ‘역사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하필 현충일에 일본 국빈 방문에 나서 회담 성과보다는 형식이 논란이 됐는데도 이를 망각하고 또 다시 실수했다는 지적이다.

한 학계 관계자는 "기념과 상징을 중시하는 일본의 외교적 술수에 또 한 번 정부가 말려들었다"며 "군국주의의 상징 지역에서 과연 한일 과거사가 제대로 논의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도 "양국의 미래관계 발전을 논의할만한 다른 의미 있는 장소가 있을 텐데 정부가 외교적 관례만을 내세워 자신들의 실수를 무마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회담 개최장소 보다는 회담의 의제와 논의사안이 중요하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장소만을 따진다면 전범(戰犯)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가 있는 도쿄(東京)에서도 한일회담을 열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냐"며 "회담의 알맹이가 중요하지 껍데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日 "이미 장소 발표…왜 지금 문제삼나"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측에서 공식적으로 회담 장소 변경 요청은 없다. 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것"이라고강조하고 있다. 쉽게 회담 장소를 바꾸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일본측은 지난 10월7일 베트남에서 열렸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만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회담일정과 장소에 합의해 공식 발표까지 했는데 지금 바꾸는 것은 외교관례에 어긋난다는 분위기이다.

일본측은 또 1998년 11월 오부치 게이조(小惠三) 총리와 김종필 총리가 참석하는 한일 각료회의가 가고시마에서 열렸고 사츠마야키 발상지를 견학까지 한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이제 와서 가고시마는 안된다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휴양지에서의 노타이 셔틀 정상외교"를 제안한게 한국측이고 첫 회담 장소인 제주도와 격이 맞는 휴양지이면서 일본의 상징인 온천과 세계 자연유산인 야쿠시마섬 등을 갖춘 가고시마를 골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겨울이라 따뜻한 남쪽 큐슈(九州)지방을 물색했는데 오이타(大分)현은 김영삼-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회담이 열렸던 곳이라 가고시마가 낙점됐다고 설명한다.

한 관계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은 도쿄의 얼굴인 우에노(上野)공원에도 있다"면서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일본에서 회담할 곳이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왜 문제인가?

가고시마현은 흔히 근대 일본의 발상지로 불리운다. 가고시마현에 있던 사츠마(薩摩)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던 조슈(長州)의 2개 ‘한’(藩:일본식 봉건제 지방정권)이 손을 잡고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정권을 무너뜨려 메이지(明治)유신의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사츠마의 주역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盛:1827~1877)이고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의 거두로 알려져 있다.

◆ 정한론의 고향인가

1870~1873년 메이지 정부는 국교수립을 조선 정부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무례한 조선을 정벌해 개국시켜야 한다"는 정한론이 무사계급에 비등했고, 사이고는 당시 무사계급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사이고는 내치를 중시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에 밀려 실각해 낙향했다. 사이고는 반체제 무사들에게 추대돼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부군에 진압당한 뒤 자결했다. 이를 세이난(西南)전쟁이라고 한다. 정한론을 둘러싼 대립의 실제 이유는 한 폐지와 징병제 도입을 통한 급격한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오쿠보파와 무사계급의 권익을 유지하려던 사이고파의 노선투쟁이었다는게 일본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오쿠보 역시 사츠마 출신으로 사이고와는 의형제나 다름없었다. 정한론과 반대론이 모두 가고시마에서 나온 셈이다. 사이고를 현창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사이고가 직접 정한론을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며 "대만 정벌과 강화도 사건을 실제 주도했던 오쿠보파가 나중에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정한론 때 오쿠보와 함께 반대파에 섰지만 초대 한국 통감으로 식민지지배를 완성했다. 정한론은 또 이미 도쿠가와 말기 에도(江戶) 지역의 유학자들이 처음 주창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정한론=사이고=가고시마’ 라는 등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 가미카제의 근거지?

치란(知覽)을 비롯한 가고시마 곳곳에는 태평양전쟁 때 가미카제(神風)특공대 기지가 있었다. 일본 본토 최남단으로 오키나와(沖繩)를 향해 출격하기에는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다카쿠라 켄(高倉健) 주연의 영화 ‘호타루’도 치란 기지를 무대로 징병당한 한국인과 일본 여인의 사랑을 그렸다. 일본에서는 "가미카제의 참상을 반성한 영화"로 평가 받았지만 한국에서는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들어 양국민의 인식차를 실감하게 했다.

◆ 임진왜란의 악연

임진왜란 때 끌려와 심수관(沈壽官)이란 이름 등을 세습하며 세계적인 ‘사츠마야키(薩摩燒)’를 만든 조선 도공 후예의 근거지도 가고시마다. 일본측은 사츠마야키를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다. 가고시마현은 1994년부터 전라북도와 교류회의를 개최하고 있고 가고시마현, 이부스키(指宿)시 모두 한국어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로 한국 관광객 유치에 열심이다.

그러나 조선의 도공들이 시마즈 영주의 전리품으로 끌려왔다는 점, 이들이 오랫동안 망향의 아픔을 달랜 흔적 등은 가고시마를 찾은 한국인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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