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풍경 / 후안 고이티솔로 지음·고인경 옮김 / 실천문학사 발행·1만2,000원스페인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후안 고이티솔로(73)는 10년쯤 전 이슬람권의 대표적 분쟁지역인 사라예보, 알제리, 팔레스타인, 체첸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해마다 한 곳씩 분쟁의 현장을 차례로 방문해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벌어지는 일들을 목격했다. 분쟁의 역사와 그 속의 피 묻은 사건을 담은 책이며 기사 따위 기록물을 섭렵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방문의 기록은 당시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에 연재됐고 뒤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스페인에서 문호의 반열에 들고 아랍어에 가장 정통한 작가로 평가받는 고이티솔로의 ‘전쟁의 풍경’은 바로 그 답사의 기록이다. 이른바 ‘르포문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감상이나 체험의 나열이 아니라 이슬람과 서구의 오랜 대립, 뿌리 깊은 분쟁에 대한 냉정한 해석과 전망까지 포함한 일종의 보고서이다.
보고서는 문호의 글답게 유려하면서도 세세하다. 그 세심한 보고들은 짧게는 수십 년을, 길게는 몇 백년을 이어 내려온 갈등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수가 많냐 적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들 순교를 한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이 있고, 동물처럼 이 게토에 영원히 갇혀 있습니다. …죽는 것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귀환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지지를 업고 이스라엘이 펼치는 강경정책에 신음하는 팔레스타인 교수가 내뱉은 말에는 죽음 앞에 이른 팔레스타인 민족의 고통이 절절이 배어있다. 게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는 바로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땅인 바로 그 ‘격리지구’였다.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둘러본 뒤 고이티솔로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손을 내미는 대신, 무력으로 얻은 땅은 한 치도 내주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넓은 아량과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해결할 수 있을 갈등에 점점 더 독을 뿌리는 일일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팔레스타인인의 정체성과 그들 국가의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해주는 것만이 중동에서 발생한 이 비극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의 양심을 유린한 ‘인종청소’ 지역 사라예보에는 미국의 문화비평가 수전 손탁과 함께 갔다. 밀로셰비치와 카라드지치의 지휘 아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원리주의자들이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을 쓸어버리는 그곳에서 그는 총알과 대포 사이로 물을 구하러 나서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꺼지지 않는 의욕, 무차별 강간과 살인 등 용서할 수 없는 폭력 속에서도 자비와 동정을 잃지 않은 무슬림들의 심성을 목도했다.
체첸을 다녀온 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인구 100만명 남짓의 작은 민족 체첸에게 무슨 죄를 물을 것인가? 천박하고 불명예스러운 민족을 전멸시키겠다는 강대국 러시아의 전략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인가.’ 언뜻 보기에 고이티솔로는 이슬람쪽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굳이 편을 따지자면 그는 약자, 또는 소리없이 당하는 민중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거의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국제뉴스의 그 메마른 문장 행간에 어떤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 숨어있는지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책은 대표적인 분쟁지역의 현실을 한눈에 살피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10년 전 이야기들인데도 그가 본 현실과 분석, 진단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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