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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상처가 삶이 돼버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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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상처가 삶이 돼버린 당신…

입력
2004.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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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는 창에 손바닥을 대고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떨림이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5년 된 소설가 윤성희 씨의 단편 ‘거기, 당신?’은, 시비조의 제목과는 달리 ‘가늘게’ 시작해서 끝까지 ‘가만히’ 이어진다.

느낌? 그것도,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는 아릿한 떨림 정도라고 할까. 그 떨림을 싸잡는 한마디가 있다면 상실감, 어려운 말로는 ‘실존적 고독’이겠다(작가는 까뮈를 좋아한다고 한다). 해설을 쓴 소영현(문학평론가)씨는 "갈등도 싸움도 욕망도 없다"고 했지만, "없는 듯하다"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일 게다. 상실과 고독조차 특수한 상황에서 야기되고 쉬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전체의 밑바닥을 타고 가늘고 가만히, ‘존재론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책에는 그런 단편 10편이 묶여 있다.

소설에는 그, 그녀, 남자, 여자, L, W, Q 등이 간단없이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개성이 없다. 거의 없다는 의미다. 조실부모 했거나 형제를 잃었거나, 끌리던 사람을 잃었거나, 정상적이었다고 여기는 과거의 궤도에서 이탈한 자들이다. 그 상실에는 특별한 사연도, 까닭을 따질 근거도 없다. 누구에게나 ‘똑바로 걸었는데도 넘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그들은 ‘아무 곳에도 끼울 데 없는 나사’처럼 대체로 우울하다. 그렇다고 꼭 맞는 암나사를 찾지도 않는다. 대충 아무 구멍에나 밀어넣고 ‘돌멩이를 주워와 나사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 게 그들의 대응방식이다. 그들에게는 구체적인 욕망 대신, 과거의 특정 해에 발행된 동전을 찾자고 잔돈 뒷면을 살피는 정도의 사소한 집착만 있다. 그 집착은 부유(浮游)하는 삶의 끈을 당겨 언젠가는 한 지점에서 멈추게 해줄 지 모를 말뚝 같은 것, 거짓 위안 같은 것이다. ‘만우절 모임’의 불문율처럼, ‘그 이야기들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물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가족이나 관계의 연대감 역시 지극히 느슨한 형태로만 등장한다. 패러글라이딩을 배우고 싶어 든 적금으로 유학 보낸 남동생은 주소도 모르고, 다시 든 적금으로 시집 보낸 여동생의 휴대폰은 결번이다. 그에게 관계란 사연 있는 물건만 모아 파는 중고가게의 잡동사니에 매개된 물화(物化)한 추억 같은 것. 작가는 "해체된 가족도 아니고 전통적 가치관으로 자리잡은 가족도 아닌,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가족을 모색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처지의, 이런 성격의 인물들은 자극이나 변화에 둔감하다. 그것이 작가의 건조한 문체와 한대목씩 잘라내고 건너뛰듯 이어가는 문장 안에서 더더욱 무심한 인물들로 변한다. 좋아하던 직장 동료가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다음 날, ‘그녀’ 역시 검은 옷을 입는데, ‘지퍼를 채우자 허벅지가 답답하게 죄어왔고 버튼을 채우기 위해선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는 식이다. 먹는 것을 귀찮아 하던 ‘그녀’는 남자의 실종 이후 ‘남들처럼’ 음식을 먹는 것으로 상실감을 달래왔던가 보다. ‘그녀’의 상실감은 허벅지의 쫄림 만큼 생경한 상징으로 묘사될 뿐이다. 분신 같던 쌍둥이 동생의 죽음은 ‘(동생 몫까지) 하루에 두 번씩 꼭 껴안아’ 주는 아버지의 포옹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상처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주위에서는 호들갑으로 난린데, 정작 본인은 무연히 그 상처를 바라보고 선 형국. 작가가 ‘거기, (서있는) 당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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