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만의 귀향은 따뜻했다. 긴 세월 마음으로만 그리던 고향을 찾은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78)씨를 맞아 경남 통영 거리에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가 나온 통영초등학교 학생들은 "선배님을 환영합니다"라고 썼고 예총 통영지부는 그저 ‘박경리, 박경리, 박경리’라는 단 세 마디로 오랜 기다림을 표현했다.5일 오전 10시가 다가오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남망산 기슭 통영시민문화회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 도착한 그의 강연을 들으러 온 것이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 다음 날이면 다시 떠날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로 대극장 800여 석이 다 찼다. 강원 원주의 토지문화관까지 직접 가서 그를 모셔온 진의장 통영시장의 안내를 받으며 그가 입장하자 트럼펫이 울렸다. 애달픈 망향가 ‘고향의 노래’였다. 다들 일어나 따라 불렀다. 무대 가운데 의자에 앉아 노래를 듣던 그는 감개무량한 듯 눈을 감았다. 진 시장은 "선생이 고향에 내려오기 전날 한숨도 못 잤다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그는 고령에다 3년 전 허리를 다쳐 몸이 안 좋다면서도 앉아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굳이 선 채로 30분 간 강연을 했다. 이날 아침 일찍 세병관(洗兵館)과 모교인 통영초등학교를 들러 온 터였다.
"통영에 들어선 순간,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슬픔이나 실망을 떠나 어리둥절했습니다. 바다와 모든 것이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좁아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세병관을 보자 눈물이 돌았습니다. 건물 자체의 완벽한 구조가 너무나 진한 감동으로 제 가슴을 조여왔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열 배쯤 커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도 가슴이 계속 떨립니다. 일제가 지배하던 제 어린 시절의 세병관은 비록 누추하고 초라하지만 마음으로 의지하는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말 한 마디만 잘못 해도 목숨이 위험하던 그때 거기에 빨간 분필로 씌어진 ‘독립만세’나 일본을 비판하는 낙서가 있었으니까요."
고향을 다시 찾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린 것일까. 그는 통영을 떠나 산 지난 세월을 ‘생존투쟁’의 나날이었다고 말했다. 얼마 안 되는 고료로 생계를 꾸려야 했고 대하소설 ‘토지’에 매달려 25년을 바쳤다. ‘토지’를 다 쓰면 해방될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10년 동안 원주의 토지문화관을 꾸리느라 힘들어서 고향 뿐 아니라 다른 어디도 못 가봤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이 왜 한 번도 못 왔냐고 물으시면, 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기질 탓도 있습니다. 어릴 적 저는 방 안에만 있는 ‘구멍지기’라고 어머니한테 야단맞곤 했지요. 결혼 때도 이웃에서 이 집에 처녀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줍음이 많아서 지금도 낯선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요. 잘 나고 도도해서가 아니라 제가 워낙 그래요."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는 한편 그는 통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드러냈다. "‘토지’는 제가 통영에서 나고 진주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못썼을 것입니다. 진주가 어떤 곳입니까. 민란 시발지 아닙니까. 통영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순신 장군이 통영의 예술적 감수성을 포함해 모든 것을 만들었지요. 일제시대에도 제가 아는 한 통영에는 단 한 사람도 친일파가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이순신 장군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순신은 단순히 뛰어난 장군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해야 할 전형입니다. 그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 혹은 개인적 욕심이나 영광을 위해 싸운 게 아니고 오직 우리 민족의 편안한 삶의 권리가 침해 당한 데 맞서 저항했다는 점에서 패권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침략이 없었다면 시인이나 관리, 학자가 되었을 사람이고, 오늘날 지구 단위에서 보자면 온 생명을 위해 싸울 사람입니다. 우람한 무장이 아니라 사색하는 사람이고 화사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녔으면서도 이성으로 균형을 지켰던 사람이지요. 그가 힘으로만 대결했다면 일본을 절대 못 이겼을 것입니다. 모두들 이기느냐 지느냐의 승부에만 매달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누구보다 필요한 인물입니다. 통영은 이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하고 정부도 장군의 이런 진면목을 확립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렵게 긴 세월을 건너 찾아온 고향에서 그는 예상과 달리 그저 반가움이나 회환의 넋두리만을 풀지 않고 민족과 생명을 강조했다. 통영을 떠나 서울로, 다시 원주로 옮겨 산 지난 반세기 동안 그의 고향은 세계로, 그리고 우주로 확대된 느낌이다.
통영=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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