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작가 조세희씨는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를 ‘우리 민족의 국민총생산(GNP)을 한 차원 높여 놓은 작품’이라 평했다. 1897년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고난에 찬 역사를 700여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에 바치는, 모자람 없는 찬사다. 25년간 4만 여장의 원고지에 옮겨진 이 작품이 완간 10년 만에 다시 드라마로 옮겨진다.SBS가 27일부터 선보이는 50부작 ‘토지’(토·일 오후 8시45분)는 1979년, 89년에 이어 세 번째 제작되는 드라마.
‘관촌수필’ ‘화려한 시절’의 이종한 PD가 연출을, ‘한 지붕 세 가족’ ‘숙희’의 이홍구 작가가 집필을 맡았다. 박상원 김미숙 도지원 등 중견 연기자를 비롯해 100여명의 연기자가 투입되고, 제작비도 150억원에 달한다. ‘토지’ 주무대인 경남 하동군 평사리와 강원 횡성에 각각 1만여 평의 세트장을 짓고 있다. 그러나 원작의 무게를 제대로 살려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종한 PD도 "2003년 10월부터 꼬박 1년간 촬영하고 있지만 ‘토지’를 드라마화 한다는 것 자체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기에 최참판댁 당주 서희 역을 맡은 김현주(26)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트레이드 마크인 생글생글한 웃음을 지우고 서릿발처럼 냉엄한 여인에서 ‘생명’의 참뜻을 알아가는 원숙한 여인까지 폭 넓은 연기를 소화해야 한다. 또 89년작 ‘토지’에서 서희 역을 맡아 "찢어 죽일테야, 말려 죽일테야"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며 사람들 뇌리에 강한 이미지를 남긴 최수지를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5일 강원 횡성군 촬영 현장에서 만난 김현주는 씩씩했다. 노년 연기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첫 회가 서희의 회상 장면으로 시작돼서 노역 분장을 했는데 그때 찍은 사진 보여주니까 친구들이 ‘굉장히 귀여운 할머니’라고 하더군요." 냉정한 연기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몰라서 그렇지 저도 은근히 그런 면이 있다"고 받아친다.
새로운 ‘서희’를 보여줄 계획도 이미 서있는 듯했다. "그간 서희는 독하고 냉정하고 강한 여성으로만 그려졌는데요, 토지 완결판인 5부에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나오거든요. 그런 부분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요." 요즘 4부를 읽고 있다는 그녀는 "서희가 어렸을 때 버릇 없고 못된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된다. 엄마가 도망가고 아버지, 할머니는 어려서 죽고 재산까지 빼앗기게 되니 자기를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나름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시작했는데 주위 분들이 ‘되게 부담 되겠다’고 죄다 그러세요. 그래서 조금씩 걱정되고 있어요." 그녀가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이 ‘부담’의 무게가 단순한 스트레스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끊임없이 분발하게 하는 ‘힘’이 된다면, 21세기 새로운 ‘서희’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
횡성=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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