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결과로 본 美 사회상2004년 미국 대선은 4년전과는 또 달라진 미국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상상 이상으로 종교적 가치를 중시한 사회 분위기, 9·11 테러로 싹튼 우려가 피해의식으로 내면화 한 상황 등은 각국 전문가들의 미국 관을 새롭게 했다.
2일 출구조사에서 나타난 유권자 성향에 따르면 22%의 유권자가 도덕적 가치를 가장 중요한 투표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제(20%) 테러리즘(19%) 이라크 문제(15%) 등 다른 현안은 모두 뒤로 밀렸다. "세계 제국 미국이 대통령을 뽑는 데 경제, 정책 등 객관적 기준 대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 것은 분명 이례적"이라고 BBC 방송은 지적했다.
미 유권자들이 중시한 도덕적 가치는 여러 맥락에서 볼 때 종교적 가치, 즉 신앙과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유권자 분포로 볼 때 유권자의 84%가 개신교(54%) 가톨릭(27%) 유대교(3%) 등 기독교도이고, 다른 종교 신자(7%)까지 포함하면 유권자중 신자 비율은 90%를 넘는다. 더욱이 이들의 80%는 매주 또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착실한 신앙인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번 대선에서 조지아, 켄터키 등 11개 주에서 동성간 결혼을 금지하도록 연방헌법을 개정하자는 주민 투표안이 동시에 다뤄진 것 등이 유권자들의 종교적 성향을 크게 자극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 주에서 종교인들이 동성 결혼 반대 여론을 고취시킨 결과 유권자의 60~83%가 동성간 결혼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유럽 언론들은 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보수 층 결집을 위해 종교적 이슈를 크게 부각, 신앙을 가진 유권자들이 역대 어느 선거 때 보다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선거 전문가들은 또 유권자들의 75%가 테러 위협을 느끼고, 실제로 테러를 걱정하고 있다고 밝힌 점에도 주목했다. 경희대 임성호 교수는 "유권자들이 테러리즘, 대 테러전과 연관된 이라크 전 등 안보 이슈를 경제 이슈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미 선거사상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3년 전 9·11 테러로 싹튼 안보 불안심리가 대 테러 전을 거치면서 표심을 결정하고 국가의 진로를 결정할 정도로 확산됐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의약용어에 비유,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 행태 등을 용인하는 미 사회 분위기를 ‘테러 후 일시적 장애’정도로 간주하는 외부 시각은 수정돼야 할 것 같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골 깊어진 ‘2개의 미국
치열했던 2004 대선은 두 개로 조각난 미국을 남겼다. 미국인은 지역과 성, 종교, 소득 등 갖가지 이유로 갈라섰다. 관용과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전통을 저버리고 상대의 기본적인 가치관을 멸시하고 있다. 서로를 미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로 불거진 공화·민주 양당 감정의 골은 이번 선거에서 더욱 패이게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톰 스미스 시카고대 교수는 "베트남전으로 온 나라가 홍역을 치른 1960년대 말에 버금가는 혼란과 불안을 경험했다"며 선거 후유증에 대해 우려했다.
테러리즘과 경제정책 등이 최대 이슈였던 이번 선거에서 주별 개표 결과는 ‘양극화한 미국’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시 대통령은 뉴 햄프셔를 빼고는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던 모든 주에서 또다시 이겼다. 도시 지역은 민주당(존 케리), 농촌 지역에서는 공화당(부시)이 강하다는 분할구도도 그대로 재현됐다. 보수 세력이 두터워 60년대 이후 공화당의 아성이 된 남부에서 케리 후보는 전패(全敗)했다. 특히 부시 진영은 미국의 분열을 십분 이용하고 편을 가르는 선거전략을 구사했다. 전문가들은 "공화당은 기존의 텃밭만 지키면 중도 성향의 유권자는 포기해도 재선할 수 있다고 판단, 부시 독트린 등 보수 세력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밀어 붙여 재미를 보았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는 또 부유층은 공화, 약자는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기존의 정치 구도와도 대부분 맞아 떨어졌다. 백인과 5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자, 예비역 군인, 신앙심 깊은 사람은 주로 부시를 찍었고 저소득자와 흑인, 히스패닉계, 성공한 여성은 케리에게 표를 주었다.
그러나 정책과 이념 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등 유권자의 판단 기준은 점점 모호해 지고 있다. 출구 조사에서 케리를 찍었다는 응답자의 75% 이상은 "케리의 정책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지 부시가 싫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반면 개신교 신자의 4분의 3은 가톨릭 신도인 케리에게 등을 돌린 채 부시에게 몰표를 던졌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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