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한을 풀었다.’조지 W 부시 대통령은 3일 2004년 대선에서 승리를 확정할 경우, 두 번 연속 ‘부시 왕조의 복수’를 이어가게 된다. 그는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를 법정 공방 끝에 꺾어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한 불의의 일격을 앙갚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재선에 실패한 아버지 부시의 한(恨)을 풀었다. 또 그의 평생에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뛰어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아버지 부시는 1990년 걸프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1991년 상반기 90%대의 높은 여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경제 불황을 극명하게 표현한 "문제는 경제다, 이 멍청아!"라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구호에 치명타를 입고 ‘아칸소 촌뜨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들 부시는 달랐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9명이 "실패한 4년"이라고 혹평할 정도로 경제 분야에서 ‘업적’이라고 말할 만한 게 없다. 그럼에도 미 국민은 부시에게 미국을 4년 더 이끌어갈 전권을 부여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술을 끊고 새 삶을 찾았다는 아들이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아버지를 뛰어넘은 것이다.
언어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말 실수를 하지만 유머 감각과 장난기 가득한 얼굴 등 인간적 매력은 아버지가 갖지 못한 장점이다. 부시 대통령은 1994년 텍사스 주지사에 당선되고, 1998년 재선 될 때까지 아버지 부시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부시 자신의 능력과 업적보다는 아버지 부시의 후광이 더 커 컸던 탓이다. 때문에 부시 대통령이 2000년 대선에 당선되자 "알코올과 마약에 탐닉했던 철부지 대학생이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조지 부시 주니어가 조지 W 부시라는 제 이름을 찾았다"라는 말들이 나왔다. 2대 존 애덤스 대통령과 6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이란 기록도 아버지 부시의 그늘을 느끼게 했다.
부시는 명문 예일대를 졸업하고 석유회사를 운영하는 등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다녔지만 그렇게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다. 1978년 하원 의원에 도전했다 낙방했고, 이후 1986년까지 석유탐사회사를 운영했으나 결국 다른 회사에 합병되는 등 큰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명문가의 그저 그런 아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1988년 부유한 투자자들을 모아 프로야구구단 텍사스 레인저스를 인수하면서 그의 인생은 뒤늦게 피기 시작했다. 그는 구단주 역할을 하면서 텍사스를 누비고 다녔고 언론과도 수천번의 인터뷰를 하면서 유명 인사가 됐다. 그 바탕으로 1994년 텍사스 주지사가 된 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의 초당적 협조도 이끌어냈다.
부시는 2001년 9·11테러와 뒤 이은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인한 미국 사회의 거센 보수화 바람이 없었다면 재선이 힘들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어쨌든 미 국민은 다시 한 번 부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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