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소설을 쓰는데요. 여자주인공을 죽였음 해서요. 알려진 병 말고 희귀병이나 불치병으로 죽이려는데… 좀 알려 주세요. 겉으로 보기는 이상이 없어야 하니까 뇌는 멀쩡해야 해요.’또는 이런 질문. ‘20대 후반 남성이 가장 많이 걸리는 불치병이 뭘까요. 과도한 스트레스, 흡연, 음주로 병이 악화되고 이왕이면 자각하기 힘든 구토나 두통 정도로 시작해 점점 끔찍해지는 병이었으면 좋겠어요.’
궁금하면 무엇이든 물어보는 세상, 인터넷에 올라온 질문들이다. 오늘도 수많은 소설가, 시나리오·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은 불치병, 희귀병을 찾아 인터넷을 헤맨다. 그래도 ‘여자주인공을 죽였음 해서요’라는 말에는 가슴이 좀 철렁한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단골로 걸리던 병은 백혈병이었다. 그러다가 "왜 맨날 주인공은 백혈병만 걸리냐"는 원성에 공부 좀 하더니 특발성 폐섬유증, 안암 같은 의학서적에서 툭 튀어 나온 듯 생소한 병명까지 등장했다. 그러다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알츠하이머, 즉 치매다.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손예진은 처음에는 건망증이 심하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종종 잃어버리고 길을 헷갈리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가끔 일어난다. 그런데 서른 살도 안 된 그녀의 병명이 치매. 기억은 최근 것부터 잊혀져 가장 먼저 잊어 버리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남편이다. 정말 무릎을 칠 대발견. 기억을 잃어가는 불치병. 사랑한 기억을 잃는 것은 연인들에게는 가장 큰 재앙일 것이다. 이제 단골로 등장하는 병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
불치병은 심지어 코믹한 설정을 위한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여자 주인공은 성욕이 쌓이면 몸에 물이 차올라 몸 밖으로 흘러 넘치는 병을 앓고 있다. ‘몽정기2’의 남자 주인공은 예쁜 여자만 보면 방귀를 뀌는 희귀병에 시달린다.
새하얀 얼굴에 훅 불면 날아 갈 것 같은 파리한 모습으로 하얀 병실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의 간호를 받는 장면이 자아내는 비련미를 상상하며 "죽지 않는 불치병은 없나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철없는 소녀들만 탓할 일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주인공을 죽였으면 그럴까. 무좀만 걸려도 못 견디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면서 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