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일 예상을 깨고 낙승을 거둠에 따라 집권 2기 전시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됐다. 이번 선거는 부시 대통령이 지난 4년간 이끌어온 국가의 방향과 그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의 성격을 띠었다.미국민들은 4년간의 공과에 대한 상반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의 재선 길을 열어줌으로써 미국의 궤도 수정보다는 현상의 유지를 택했다. 위기의 순간에는 총사령관을 바꾸지 않은 미국민의 정서가 이번 대선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부시의 승리는 4년 전‘법전 대통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출범했던 그가 완전한 정통성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시는 이제 반쪽 대통령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성공한 대통령으로 미국의 역사에 자리매김하는 일에 전력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이번 선거 결과 공화당이 상·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됨으로써 부시 대통령은 최소한 중간선거가 치러지는 2006년까지는 의회의 지원아래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환경은 부시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할 장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재임기간 중 테러와의 전쟁 강화를 명분으로 각종 애국관련 법안이 성안돼 국민의 일상사를 지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부시 재선의 한 켠에서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유사 경찰국가’의 탄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기독교 원리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그의 정책이 9·11 이후의 강한 애국주의 정서와 결합함으로써 미국 사회는 더욱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을 예상된다.
일방주의 외교 정책과 선제공격론으로 상징되는 ‘부시 독트린’은 집권 2기에도 큰 변화 없이 세계 안보 전략의 틀로 계속 작용할 전망이다. 공화당은 9월 전당대회 때 채택한 정강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위하는 길이라면 테러와의 전쟁 수행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동의를 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이 재현될 경우 갈등과 반목의 그림자가 국제사회에서 쉽게 거둬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후 안정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협조가 필요한 만큼 그가 동맹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취할 가능성도 크다.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를 차기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어 북한과 이란 문제에 대한 강경한 기조는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선의 성공으로 부시가 누리게 될 기쁨은 짧은 순간에 그칠 수 있다. 무엇보다 완벽하게 둘러 쪼개진 미국이 그의 치유를 기다리고 있다.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세찬 도전을 물리치긴 했지만 선거과정에서 드러난 성난 민심은 그에게 강력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를 추스려 일자리를 만들고 재정과 무역 등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테러 문제보다는 경제 문제를 투표의 우선 요소로 꼽았다는 유권자들의 반응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싸늘하게 식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si8101@hk.co.kr
◆승패 요인은
기록적인 투표율도 2000년 대선 구도의 벽을 허물지 못했다. 박빙의 접전을 이어온 미 대선은 뚜껑을 열어본 결과 2000년 대선 결과의 거의 완벽한 재판이었다. 존 케리 민주당 후보는 40년만의 가장 높은 투표율과 신규 등록자의 급증, 젊은 유권자의 투표 열기에 기대어 개표 초반 정권 교체의 희망을 품었으나, 승리의 여신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쪽으로 미소 지으려 하고 있다.
3일 아침 6시 현재 (현지시간)까지 개표 결과 케리 후보가 뉴 햄프셔주(선거인단 4명)를 빼앗고 부시 대통령이 아이오와주(7명)와 뉴 멕시코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게 나타나는 등 부분 교환을 제외하곤 2000년 대선 때 그어졌던 레드(공화당 승리지역)와 블루(민주당 승리지역) 구분은 그대로 재연됐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플로리다(27명)에서 비교적 큰 차로 승리를 확정지은 데 이어 오하이오(20명)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케리 후보는 펜실베이니아(21명)를 지키는 등 선거인단이 많은 접전주‘빅 3’에서의 이변도 벌어지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의 승리는 무엇보다 테러와의 전쟁에 따른 안보 심리가 강하게 작용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부시측은 케리 의원의 이라크 정책에 대한 표결 내용을 물고 늘어지면서 ‘입장을 자주 바꾸는(Flip-flop)’믿을 수 없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등 네거티브 전략을 통해 케리 후보를 수세적 입장에 몰아놓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미국이 4년 전보다 훨씬 안전해졌다"는 부시 대통령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안보 엄마(Security Mom)’들도 부시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안보 문제에 대한 공방은 케리 후보가 자신의 강점인 국내 정책과 경제 문제에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좀 더 확고하게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자리 상실 문제가 심각했던 오하이오, 아이오와 주 등 중서부 지역에서 케리가 예상보다 고전한 것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9·11 이후 미국 사회의 보수적 흐름도 부시 당선에 한 몫을 했다. 부시 진영은 처음부터 케리 후보를 ‘매사추세츠의 급진 좌파’로 모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독립적 성향의 부동층이 케리 쪽으로 향할 여지를 차단했다.
또 아버지 부시가 열성적 보수층의 외면을 받아 낙선할 것과는 달리 부시 대통령은 감세정책을 내세우고 낙태 및 동성 결혼 반대 등에 분명한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AP 통신은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4분의 3이 부시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밝혀 기독교인들의 투표 참여도 부시 승리에 큰 힘을 보탠 것으로 분석된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임성호 경희대 정외과 교수
부시의 승리는 미 국민의 안보 불안감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다. 미 국민은 이라크 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고, 미군이 중동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불안심리가 팽배할 때는 현직 대통령을 밀자는 정서가 강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부시는 대외적 매파로 인식되고 있는 공화당 후보다.
최근 뉴욕 타임즈의 여론조사에서도 미국 유권자들이 경제보다 안보를 더 중시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경제가 안보에 밀린 것은 역대 대선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경향이 대외적으로 강경 노선을 걷는 부시 지지로 연결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거전 막판 돌출한 ‘빈 라덴 변수’는 부시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빈 라덴도 조직의 단결을 위해선 부시라는 확실한 적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투표 전 여론조사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했던 여성 유권자 일부가 부시로 지지후보를 바꾼 것도 안보 불안심리에 기인한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이 안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번엔 부시와 케리의 여성 지지율이 거의 균형을 이뤘다.
이번 대선의 투표율이 높아졌지만, 젊은 층 투표만 늘어난 게 아니다. 부시를 지지하기 위한 여성유권자와 민주, 공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으나 안보에 불안감을 느낀 중간 층의 투표율도 상당히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케리는 테러와의 전쟁을 감당하기엔 리더십이 약한 게 아니냐는 인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패인으로 지적된다. 사실 테러를 근절해야 한다는 케리의 의지는 부시와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안보 불안이 미국을 휘감고 있는 상황은 그로서는 넘어서기 힘든 벽이었다.
이렇게 볼 때 부시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안보가 경제를 제치고 최대 선거 이슈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직 대통령이 이 정도의 박빙 승리 밖에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케리가 진 게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부시는 지난 4년간 대내외 정책에 있어서 지나치게 강한 보수 성향을 보였다. 이라크 전쟁 등 대외 정책은 물론이고 국내적으로도 진보 세력을 비난하며 보수 기반을 다지는 데만 주력해 왔다. 그는 적과 동지를 갈라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정치에 익숙했다.만약 부시가 보다 포용적 자세를 취했더라면 보다 여유 있게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시는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선거 환경 속에서도 왜 이렇게 근소하게 밖에 이길 수 없었는지에 대한 분석과 자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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