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여 야구팬들의 함성도 집어삼킬 만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1일 밤 잠실야구장. 마운드에는 두 사나이가 서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너밖에 없다."한국시리즈 9차전 9회말 동점 주자(1사1,2루)까지 진루하자 직접 마운드로 올라간 김재박 현대 감독은 물기에 젖은 공을 닦아주며 마무리 투수 조용준에게 "너만 믿는다"며 등을 두들겼다. 결국 조용준은 유격수 박진만의 실책으로 1점을 더 내주기는 했지만 강동우를 땅볼로 처리, 팀을 2년 연속 챔프의 권좌로 이끌었다.
이틀 뒤인 3일 오전 한국일보 11층 인터뷰실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가을 햇살로 물든 경복궁을 내려다보면서 김 감독은 "야구 인생 30년 만에 가장 잊지 못할 승부였다"고 털어놓았다. 잔잔한 톤의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그 날의 흥분이 배어 있는 듯 했다.
김 감독은 성공한 야구인이다. 야구팬들은 아직도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전에서 ‘개구리 번트’를 대던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김재박을 기억하고 있다. 지도자로서 그는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 감독으로 부임, 5번의 한국시리즈 도전에서 4번의 우승을 이끌어내면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이 있습니까."
성공 비결에 대해서 김 감독은 ‘노력’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꺼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만해도 야구를 잘못했다"는 김 감독은 뒤늦게 야구에 눈을 뜬 것도 지독한 연습의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감독은 재목을 고를 때도 당장의 실력보다 자세와 성격을 따져볼 때가 많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안목은 그의 빛나는 용병술로 연결됐다. 김 감독은 98년 김수경, 2002년 조용준, 지난해 이동학 등 신인왕 배출에 이어 올 시즌에는 오재영이라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그는 칭찬하는 지도자다. 꾸짖기보다 끌어안는 스타일이다. 김 감독은 "삼진이나 에러를 한 선수들이 훈련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의 경영 노하우는 분권형에서 출발한다. 혼자 챙기기보다 코칭스태프에게 믿고 맡긴다. 정진호 수석코치, 김시진 투수코치, 김용달 타격코치 등 트로이카는 8개 구단 중 최장수 코칭스태프로 막강 ‘김재박 사단’을 형성하고 있다.
팬들은 김 감독을 선수시절부터 ‘여우’라고 부른다. 승부처마다 번뜩이는 센스와 교묘한 노림수를 발휘하기 때문. 김 감독 스스로도 이 별명이 싫지않다며 멋쩍은 표정이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김 감독은 여러 번 ‘꼬리’를 쳤다. 승부의 최대 분수령이 됐던 5차전. 타격부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4번 타자로 기용된 심정수는 이 경기에서 혼자 4타점을 올리며 팀 승리를 이끄는 수훈을 세웠다. 3-6으로 뒤지던 7차전 무사1,3루. 김 감독은 이 귀중한 순간에 한국시리즈에는 처음 출전하는 무명 강병식을 대타로 내세우는 깜짝 카드를 내던졌다. 강병식은 2타점 3루타를 치면서 결국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야구는 ‘재미가 없다’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 번트가 너무 잦고 지키는 야구에 치중한다. 이른바 ‘스몰(Small) 야구’다. 김 감독은 이 같은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성적이 나쁘면 몇 개월 만에도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라는 김 감독은 "프로는 성적으로 이야기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크게 칠려고 욕심을 내다가 결국 삼성이 진 것이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김 감독은 일본시리즈 9연패의 신화적 인물인 가와카미 데쓰하루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의 야구를 신봉한다. 집에서 그의 서적을 탐독한다는 김 감독은 "10점을 앞서고 있어도 1점을 더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가와카미의 야구철학을 소개했다.
수준급 경지에 올라있는 김 감독의 골프(핸디캡 6)와 카드 게임 스타일도 야구를 빼다 박았다. "쇼트게임이 장기"라는 김 감독은 "하수가 드라이버 솜씨를 뽐내는 사이 고수는 어프로치와 퍼트로 타수를 줄인다"고 말했다. "야구도 포커와 비슷하다"는 김 감독은 블러핑(허풍)에 의존하기 보다는 마지막 카드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본다고 말했다. 40대 야구감독의 돌풍을 일으켰던 김 감독(50)은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됐다. 인생이든 야구든 이제 ‘성패의 이치’를 깨닫게 됐다는 그는 "내년 목표도 우승"이라고 자신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김응용 감독에 통쾌한 복수혈전
이번 한국시리즈는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 명장간 대결로도 관심을 모았다.
한국시리즈 10번 우승의 김응용 삼성 감독과 한국시리즈 4번(2004년 포함) 우승에 현역 최고 승률 감독(0.573)인 김재박 현대 감독 간 외나무 결투였다.
두 감독은 선발과 경기운영 방식 등을 놓고 사사건건 심리전을 펼치며 명승부의 흥미를 더했다.
누구보다 승부를 즐기는 김재박 감독으로서는 8년을 기다렸던 ‘복수혈전’이었다. 1996년 처음 사령탑에 오른 김 감독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당시 해태와 격돌, 2승4패로 쓴 잔을 마셔야 했다.
700점의 당구 실력을 자랑하는 김재박 감독은 "당구로 따지면 그 때는 100점 정도 밖에 못 칠 때였다"고 비유했다. "그동안 게임 흐름이나 상대 수읽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그는 "이제 묵은 빚을 갚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병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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