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숲이 장엄하고 황홀하다. 단풍은 잎이 물드는 것이 아니라 물이 빠지는 현상이다. 일조량이 모자라 나뭇잎이 탄소동화작용을 멈추면 엽록소도 사라진다. 엽록소가 사라짐으로써 초록색도 소멸하고 본래의 색이 드러난다. 잎이 탈색하며 무(無)로 귀의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참나무 잎의 본디 색깔은 갈색이며, 은행나뭇잎은 노랑이고, 감나무 잎은 빨갛다. 단풍 든 잎에 떨켜가 생겨, 이윽고 흩날리는 낙엽이 된다. 만추의 산은 완성과 소멸의 빛깔로 화려하고, 이별의 몸짓으로 소란하다.■ 소녀들은 교정에서 노란 은행 잎을 줍는다. 그들은 세월이 흐른 후 단풍 잎은 놔두고 은행 열매만 줍는 아줌마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순리일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또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이양하의 수필 ‘페이터의 산문’으로 널리 알려진 호머의 시구로부터, 삶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도 이 계절이다. 이 시에 쉽게 공감하는 것은, 그리스와 한국이 같이 단풍 들고 낙엽 지는 온대지방인 까닭이다.
■ 단풍과 무관한 가을산도 있다. 페루의 산이 그랬다. 안데스산맥 근처의 많은 산들은 민둥산이 되었다. 과거 백인에게 평야를 뺏긴 인디오 원주민들이 높은 지대로 쫓겨가 옥수수 감자 등을 경작하고 있었다. 굽이치는 산등성이까지 모자이크식 밭을 이룬 정경은 눈물겨웠다. 가을산이지만 단풍 들 나무는 없었다. 반대로 가을 러시아의 광대한 시베리아평원은 온통 황색으로 물든다. 마을과 인적은 보이지 않고, 백양나무 숲만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모습은 또 다른 장관이다.
■ 한국의 가을 산처럼 색의 조화를 보이는 곳도 드물다. 흔히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표현되는 우리 산은, 기실 점묘법처럼 정교하게 물든 온갖 색채의 집합공간이다. 여러 수종이 어우러져 만든 아름다운 색깔은 그러나, 금강산에서 한라산까지 너무 비슷하여 단조로운 풍경을 이루기도 한다. 일본의 산들은 좀 다르다. 인공조림이 만든 또 다른 단풍을 보여준다. 단풍 때문에 인공조림을 해야 하는지는 별개의 얘기지만, 새로운 경제적 숲 가꾸기로 풍경에 변화를 주는 것은 충분히 고려할 때가 되었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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