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학생의 날.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점화돼 전국으로 확산된 항일 학생투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광주학생운동에서만이 아니라 1919년의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운동에서도 학생들은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전위에 섰다. 해방과 독립으로 수립된 제1공화국 때 학생운동의 지향점은 자유민주주의였으니, 1960년의 4월혁명은 그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이승만 정권을 학생의 힘으로 무너뜨린 사건이었다.4월혁명으로 조성된 자유의 공간에서 민족통일이라는 대의에 눈을 뜬 학생운동은 다시 민족주의 색체를 띠게 됐고, 이 색채는 그 뒤 잇따라 수립된 군사정권들의 외세의존에 대한 반발로 한층 강화되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반파쇼 민주화운동과 반외세 자주통일운동을 동시에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학생운동이 선봉에 선 한국 사회운동은 민족민주운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민족민주운동 속에서 학생운동의 일부는 잠시나마 극단적 반파쇼(레닌주의)라는 좌편향과 극단적 반외세(주체사상)라는 우편향에 휘둘리기도 했다. 1987년 이후 서서히 진전된 정치적 민주화와 1989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목격된 현실사회주의 몰락으로 한국 학생운동은 동력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전세계적 차원의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민족분단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터라, 민족주의 흐름 위에 놓인 한국 학생운동은 아직 건재하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학생운동은 사회운동의 전위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베이징대학(北京大學) 학생들이 불을 붙인 1919년의 중국 5·4운동과 그보다 70년 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1968년 전세계를 휩쓴 좌우 반체제운동이 그 도드라진 예다. 계급 귀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생들의 준(標)지식인적 지위와 청년기 특유의 정의감이 그 배경일 것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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