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들은 출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내는 일과 돈을 벌어야 하는 필요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출판의 소유권이 변하면서 이러한 등식은 바뀌었다. 소유자는 오직 최대한 많은 돈을 버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책이 아니어도 볼 것 많아진 세상이다. 인터넷 매체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정보의 유통 경로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책은 대중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학문을 보급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권위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출판의 현실이 예전 같지 않다. 인수합병을 통해 출판사가 대형화하고, 연예오락산업처럼 시장주의 논리가 출판계 전체를 지배하면서 출판의 질적인 수준이 크게 퇴보하고 있다. 지금 고전이 된 책이 과거 차지했던 베스트셀러 목록은 처세나 자기계발서, 유명인 관련 도서가 점령했다. 대형출판사의 지고의 목표는 첫째도 이익, 둘째도 이익이다.
미국의 원로 출판인 앙드레 쉬프랭(69·사진)이 쓴 ‘열정의 편집’(원제 ‘The Business of Books’·류영훈 옮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발행)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출판계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좀 넓혀 말하자면 타락해가는 전세계 출판계에 던지는 쓴 소리다. 프랑스 출신으로 1962년 미국 판테온 출판사에 들어가 30여 년 간 이 회사를 이끌면서 유럽의 여러 지성을 미국에 소개한 쉬프랭은 출판사가 인수합병된 뒤 수익 내는 책만 출간하도록 요구하는 경영주의 압력을 참지 못해 89년 회사를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E H 카, 미국의 대표적인 비판 지성이며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노벨상을 받은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등 무명에 가깝던 저자들이 모두 쉬프랭을 만나 세계적인 인사로 발돋움한 걸 보면 이름은 낯설어도 그는 출판인으로 한 소리 할만한 자격은 충분한 셈이다.
쉬프랭은 책에서 출판산업이 인수합병을 거쳐 거대한 몇몇 다국적 복합출판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예전의 출판 가치기준이 무너지고 있다고 통탄한다. 몸집이 비대해진 출판기업들은 책의 질보다는 수익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수익을 내기 위해 잘 팔리는 책에만 집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현재 도서 선택의 폭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좁아져 있다. 이러한 책에서 지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는 ‘단순히 양이 많다고 내용의 다양성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며 ‘사실은 이와 반대로 책이 더 많이 출간될수록 더욱더 서로를 열심히 베끼고 있을 따름’이라고 지적했다.
학술서적 위주로 책을 내놓는 대학 출판부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매출 실적이 미국 대학출판부 전체보다 많은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출판환경이 변했다"는 이유로 현대시의 출판을 중단했고, 학술적으로 중요한 보급판인 ‘오퍼스’와 ‘모던 마스터스’ 시리즈를, 그리고 가치있는 계열 출판사인 ‘클라렌던 프레스’를 없앴다.
대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계 서점도 급감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5,400개였던 미국의 독립계 서점은 불과 10년만에 3,200군데로 줄었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갖춰 놓고 싸게 파는 할인서점의 확산 때문이다.
쉬프랭은 이런 추세를 막기 위해 지나친 규모의 출판기업 인수합병을 법으로 금지하고, 문화단체의 경우처럼 정부가 출판사에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 인터넷을 통해 저자가 대형출판기업을 거치지 않고 직접 독자에게 콘텐츠를 전달하는 정보 유통체계에도 기대를 걸었다. 쉬프랭의 고언(苦言)은 바로 우리 출판계가 당면한, 그래서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소리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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