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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31> 대기업과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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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31> 대기업과의 경쟁

입력
2004.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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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가을 무렵 정부는 PC를 5,000대 구입, 학교와 관공서에 나눠 주기로 결정했다. 다가올 정보화사회에 대비,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칠 요량이었다. 정부 기관도 컴퓨터를 배우고 정보화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컴퓨터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삼보로선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삼보는 당시 PC를 양산하는 유일한 업체였다. 국내 처음으로 수출도 했다. 우리는 5,000대 전부를 납품할 자신이 있었다. 기술과 경험 모두 최고였기에 당연한 기대였다. 우리는 구비서류를 갖춰 일찌감치 납품 제안서를 냈다. 그런데 나중에 과학기술처에서 심사가 있다고 해 가보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삼보 말고도 여러 업체가 제안서를 제출했다. 과기처는 모든 업체에 대한 심사를 한 뒤 기술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자기술연구소(KIET)가 개발을 도와주겠다고 설명했다. 결국 정부는 삼보와 삼성, 금성, 대우, 현대에 각각 1,000대씩 고르게 나눠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KIET를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작성, 공동개발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우리는 공동개발이 필요 없고, 당장이라도 5,000대를 갖다 줄 수 있었다. 삼보 직원들은 펄쩍 뛰었다. 이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난리였다. 나는 직원들에게 조용히 정부의 결정을 따르라고 타일렀다. 물론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찌 보면 위안도 됐다.

나는 한국의 컴퓨터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안되자 직접 삼보를 만들었다. 그런데 컴퓨터 산업에 뛰어들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듣지 않던 기업들이 자진해서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나섰으니, 어찌 됐든 내 목적이 달성된 거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정부가 사주겠다며 시장을 만들어 주니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후진국의 과학기술개발 정책은 아주 간단하다. 연구소를 짓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보다 물건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로부터 한국의 PC 산업은 경쟁시대를 맞게 됐다. 한국의 빅4(삼성, 금성, 대우, 현대)는 자기네들끼리 피튀기는 경쟁을 벌였다. 그들은 컴퓨터를 전략산업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이랬다. 그들도 장차 디지털 시대가 온다는 걸 깨달았다. 가전 제품은 물론 모든 기계가 디지털화하는 만큼 컴퓨터를 개발함으로써 기술을 축적할 필요가 있었다. 손익은 5년 뒤쯤 따지기로 하고 우선 신제품과 기술 개발에 나선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흐르면서 삼보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삼보는 PC밖에 만들지 않기 때문에 PC를 팔아 이익을 남겨야만 했다. 그런데 빅4는 눈 앞의 이해에 연연치 않고 시장 점유율 확대 작전에 들어갔다. 우리의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가 중·고교와 컴퓨터를 팔기 위한 교섭을 벌이고 있을 때 빅4가 무상으로 공급하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예사였다.

나는 대기업들이 벤처 기업인 삼보를 무너뜨리려고 의도적으로 이러한 일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빅4는 서로 맞붙으면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격렬한 싸움을 해온 게 상례였다. 삼보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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