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정신 날개 달아준 '相生의 동반자'엡손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엡손 프린터는 크게 성공해 전세계에 공급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미국에서도 컴퓨터 프린터에 관한 한 최대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했다. 나는 엡손 관계자들에게 "프린터 판매조직을 활용, 컴퓨터를 보급하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프린터를 사는 사람들은 100% 컴퓨터를 쓴다. 세트로 팔면 이익이 많아지는 게 당연했다. 그 소중한 네트워크를 썩히다니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나는 끈질기게 설득 했고 엡손도 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엡손을 통한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수출 길을 열었다. 1987년 초였다. 엡손을 통한 컴퓨터 판매 전략은 적중해 미국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삼보는 이 사업을 통해 품질관리 면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게 됐다. 엡손은 원래 시계로 유명한 일본 세이코(SEIKO)사의 일부였다. 때문에 물건을 정밀하게 만드는 데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는 엡손 브랜드의 컴퓨터를 생산하기 위해 세이코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는 바로 우리가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는 뜻이다. 당시 삼보는 미국의 컴퓨터랜드에도 PC를 공급하고 있었다. 여기에 엡손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날개를 단 셈이다.
그러나 또 다시 험한 산을 만났다. 엡손은 미국 시장에서 삼보컴퓨터가 잘 나가자 지나치게 낙관, 우리에게 한꺼번에 30만대의 PC를 발주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PC는 시계나 프린터에 비해 훨씬 변화가 빠르다. 한 모델의 수명이 짧다는 얘기다. 그런데 엡손은 컴퓨터 한 모델의 수명을 너무 길게 보았다. 결국 예상치 않은 새로운 기술의 출현으로 이 물량은 재고로 쌓였다. 엡손은 컴퓨터 사업을 한다는 게 자기 회사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 컴퓨터에서 완전히 손을 떼 버렸다. 엡손이 영업과 판매만 책임지고 제품 개발은 우리에게 맡겼다면 이런 사태를 피하고 오랫동안 컴퓨터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엡손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엡손과 기술 제휴를 맺은 83년 4월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상공부에 관련 서류를 제출했더니 담당자는 "삼성 금성 등 대기업들도 엡손하고 손을 못 잡아서 안달인데 무슨 재주로 해 왔느냐"며 놀라워 했다. 그만큼 엡손은 굉장한 회사였다.
삼보의 사세가 확장돼 자금이 부족해지자 나는 엡손에 투자를 요청했다. 그랬더니 엡손은 선뜻 액면가의 7배로 우리가 요구한 주식을 사주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3년 가까이 지난 1989년 삼보가 주식 시장에 상장됐을 때 엡손은 투자액의 몇 배를 회수했다. 결과적으로 두 회사 모두 만족한 셈이다. 97년 환란으로 삼보가 곤경에 처했을 때도 엡손은 우리를 도왔다. 그때 우리는 삼보의 프린터 부문을 인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엡손은 순순히 응해 엡손코리아를 만들었다. 삼보의 프린터 사업 부문은 없어졌으나 아직도 엡손과는 친한 사이다. 엡손은 본사가 일본 나가노 현에 있다. 이곳은 이른바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경치 좋고 평화로운 시골이다. 엡손 사람들은 그 자연 환경을 닮아서 인지 매우 순수하고 성실하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과 협력해 어려움을 겪은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와 엡손은 서로 믿고 돕는 아름다운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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