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밤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튿날 아침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슬픔도 일지 않았다. 슬픔이라니? 해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일순 마음이 후련해졌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어떤 들뜸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들뜸이 느껴졌다.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권력욕에 치여 무고하게 죽고 다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 말이다. 박정희 시대는 중앙정보부와 ‘빙고호텔'의 물고문·전기고문의 시대였고, 조작간첩과 불법 납치·연행과 의문사의 시대였고, 야간통금과 장발단속과 치마단속과 금지곡의 시대였고, 전태일의 분신과 김경숙의 투신의 시대였고, 학생 군사훈련과 일상적 국민의례의 시대였고, 일본인들의 섹스관광의 시대였고, 권력자들의 황음(荒淫)의 시대였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어놓고 저 혼자 욕망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그는 농부의 손을 붙잡고 막걸리를 마셨지만, 카메라 뒤에서 그는 미희들을 탐하며 양주를 마셨다. 그런데 그 오랜 시대의 갑각이 볼품없이 갈라졌다는 서늘한 소식을 들은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이 내게 베푼 들뜸은 결과적으로 때이른 것이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재가동은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 때의 들뜸은 여전히 내 청년기의 서늘바람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박정희가 죽은 뒤 그의 이름에 바쳐진 수많은 성인전(聖人傳)들의 과격한 수정주의가 나를 홀리려 할 때마다, 나를 그 미혹에서 깨어나게 하는 해독제 노릇을 해왔다. 그런 맑은 정신으로, 25년 전 오늘 연회석에서 횡사한 군인황제의 명복을 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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