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창간 50주년 기념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7월 15일 개막해 22일 폐막한 ‘색채의 마술사-샤갈’ 서울전은 국내 미술계에 큰 획을 그은 ‘문화적 사건’ 이라고 부를 만하다. 문화계 인사들이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단지 국내 기록을 세운 관람객의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우선 국내 전시의 격과 품질을 한 단계 높였다는 점이 꼽힌다. 샤갈전은 대표작을 포함한 120점을 ‘연인’ ‘상상’ ‘서커스’ 등 7개 테마별로 짜임새있게 구성했다. 대가의 이름을 내건 기존의 전시들이 대체로 10점 미만의 대가 작품에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섞어 일종의 기획전을 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거장 1인의 작품 100점 이상이 한번에 국내에 들어와 전시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샤갈전의 또다른 문화적 의미는 예술감상에 대한 일반의 태도가 변화했다는 점을 확인시켰다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 있는 곳에는 대중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뮤지컬이나 라이브가 아닌 순수문화, 그것도 클래식음악이 아닌 미술의 영역도 이제는 일부 애호가들만의 취향이 아니라 대중으로 저변이 넓어졌음을 눈으로 확인한 자리였다. 또 미술전시도 돈이 될 수 있다는 문화사업적 마인드를 확산시키는 계기도 됐다.
연장 1주일을 포함 약 100일 동안의 전시는 갖가지 기록과 화제를 남겼다.
관람객수를 보면 휴관일을 빼고 미술관이 문을 연 86일 간 유료관람객만 39만 5,000명에 달했다. 유료관람객 수는 발매 대행을 맡은 티켓링크의 전산기록으로 정확히 확인된 것이다. 또 집계가 가능한 스폰서 등 초대권 지참자(약 5만명)와 6세 이하 및 65세 이상 무료입장자가 약 10만명이다. 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은 총 관람객 수를 50만명으로 집계했다. 하루 평균 5,800명이 미술관을 찾은 셈이다.
그동안 국내 전시 기록은 2000년 10월 26일부터 2001년 2월 27일까지 샤갈전보다 한 달 긴 4개월 동안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오르세이 미술관 소장품’ 전으로 유료관람객 29만, 총관람객 32만명이었다. 샤갈전의 관람객 기록은 당분간 국내에서는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하루에 가장 많은 관람객이 든 날은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초 토요일로 1만 2,000여명이 찾아와 매표와 입장을 통제해야 했고, 매표행렬이 덕수궁 돌담길 입구까지 이어지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관람층이 다채로웠던 점도 샤갈전의 특징이다. 성인(만 24세 이상)이 전체 유료관람객의 49%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림을 좋아하는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샤갈의 작풍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이기 때문인지 가족과 연인, 여성 관람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원이 딸린 서울시립미술관은 도심의 피서지로, 가족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았고 데이트 코스가 됐다.
KBS와 MBC TV 등이 저녁 9시 종합뉴스 시간에 보도한 것을 비롯해 TV와 일간지, 각종 잡지 등이 샤갈전의 성황을 거의 빠짐없이 보도한 것도 샤갈전이 누린 복이다. KBS2 TV의 ‘풀하우스’ ‘두번째 프러포즈’ 등 드라마 무대로도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찾아와 관람객들과 어울렸다. 폐막 전날인 21일에는 한국 주재 12개국 대사들이 부부동반으로 찾아왔으며, 외국관광객들의 중요한 관광코스가 되기도 했다.
샤갈전이 큰 사랑을 받은 것은 이 시대의 고단함과도 무관하지 않다. 꿈과 사랑, 연인, 고향, 동물 등을 주소재로 삼은 그의 따스하고 긍정적 시선의 작품들은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과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이두식 홍익대 미술대학장은 말했다.
한기봉기자 kibong@hk.co.kr
■ 유명인들의 관람기/"다시 사랑하고 싶게하는 힘이…"
"마르크 샤갈은 그림을 통해 동족인 유대인,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늘 삶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작가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고난과 굴곡의 역사를 살아가면서도 한 인간으로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소중히 와 닿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14일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박완서, 최인호, 피아니스트 신수정, 서양화가 김점선씨와 함께 샤갈전을 관람한 뒤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날 자리를 같이 한 박완서씨도 "샤갈의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볼 때마다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최인호씨는 "연인과 가족에 대한 샤갈의 사랑이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이는 곧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며 샤갈전을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려는 우주인, 샤갈과의 소중한 만남"에 비유했다.
샤갈의 진면목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이번 전시에는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고 건 전 총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 등 수많은 정치인, 경제인들이 전시장을 찾았고,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과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직후 동반관람해 눈길을 끌었다. 소설가 함정임 성석제,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미술전문 MC겸 화가 한젬마, 그리고 탤런트 채시라 김미숙 고현정, 평소 샤갈을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유준상 등 대중스타들도 ‘샤갈 신드롬’에 동참했다.
함정임씨는 "눈을 감아도 온통 색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샤갈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왔다"며 "샤갈의 화폭은 꿈보다 신비롭고 아름답고, 샤갈의 연인들은 지독한 혼란의 끝에서도 다시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평했다.
21년 전에 관람한 샤갈전 입장권을 지금도 간직할 정도의 샤갈 마니아인 한젬마씨는 "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선과 색을 확실히 제어하고 있는 샤갈의 작품을 보면 편안한 느낌이면서도 작가로서 긴장감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샤갈 신드롬’ 이젠 부산으로
한국에 온 샤갈의 걸작들이 서울 전시에 이어 부산을 찾아간다.
한국일보와 부산광역시 공동주최로 11월 13일부터 내년 1월 16일까지 해운대에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3층 대전시실에서 개최되는 샤갈전은 ‘샤갈 신드롬’을 몰고 온 서울 전시작품들이 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부산전 공식 포스터에 사용될 ‘생 폴 위의 부부’‘비테프스크 위의 누드’, 모스크바 유대인극장을 장식한 패널화 연작 ‘음악’ ‘무용’ ‘문학’ ‘연극’ 등 115점이 7가지 테마로 펼쳐진다. 입장료는 25세 이상 64세 이하 성인 8,000원, 청소년(13~24세) 6,000원, 어린이(7~12세) 5,000원이다.
특히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한국의 샤갈’로 불리는 동양화가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전’(12월 7일부터 내년 2월 13일까지)도 열려, 생전에 만남의 약속을 미완으로 남긴 두 거장의 작품 세계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051)744-2602, (02)724-2904~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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