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원리(전5권)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발행·각권 1만8,000원1960년대 중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하버마스의 강의를 듣던 나는 무언지 모를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헤겔이나 맑스 등의 사회철학 공부는 모자랄 게 없었다. 하지만 실존철학이나 해석학, 혹은 철학적 인간학 연구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대학을 포기하고 남서부 튜빙겐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에른스트 블로흐(1885~ 1977)를 만났다. 블로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해 62년 독일 튜빙겐대학 객원교수를 수락한 세계 철학계의 거장이다. ‘법과 도덕, SS. 1971’ 등의 세미나실에는 매주 수백 명의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학생운동이 왕성할 때라 주정부에 대고 학생들이 대학 이름을 ‘에른스트 블로흐 대학’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블로흐는 독일 남서부 중소도시 만하임 인근 루드빅스하펜의 철도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었으나,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루드빅스하펜은 신흥공업도시였고, 만하임은 국립극장과 국립도서관이 있는 그런 대로 문화도시였다. 블로흐는 두 도시를 무산자계급과 유산자계급이 대립하는 곳으로 보았다. 경기가 좋았지만 빈곤은 여전했고, 그는 "바로 여기에 가장 전형적인 현실사회의 허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블로흐는 거기서 뼈에 사무치도록 극심한 빈곤을 경험한다.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고, 몸놀림이 민첩하지 못하다고 해고당할 지경이었으니. 그가 미국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집필한 것은 굶주림과 배고픔의 절규였을 것이다. 바로 그 작품이 그의 대표작 ‘희망의 원리’이다.
2차 대전이 끝났지만 그는 자본주의의 나라 서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두가 평등하게 골고루 잘 사는 사회주의 나라로 귀국했다. 그러나 동독은 진정한 사회주의국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밤의 꿈’을 꾸지 않고 ‘한 낮의 꿈들’을 꾸었다. 이 ‘한 낮의 꿈들’이 주관적으로는 ‘아직-아니 의식되고’, 객관적으로는 ‘아직-아니 형성되어’ 있는 ‘아직-아니 있음의 존재론’으로 ‘희망의 원리’에 나타난다. 블로흐에게 희망은 아직-아니 의식되어 있고, 아직-아니 완성되어 있는 참 고향의 변증법인 ‘기지(旣知)의 희망(docta spes)’을 말한다.
‘희망의 원리’는 모두 5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보고’라는 ‘작은 한낮의 꿈들’이다. 어린이는 운전사가 되고자 하고, 사탕집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져야 하는 것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나 빈곤을 이기려고 소리쳐 운다. 이러한 빈곤은 사람을 사유케 하고 행동케 하여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종의 부정이다. 이때의 부정성은 무가 아니고, ‘아니-가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빈곤은 ‘아직-아님’일 뿐,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2부 ‘선취하는 의식’은 아직-아니 의식된 것을 발견하는 ‘한 낮의 꿈’을 말한다. 그것은 ‘새 것에로 전진하는 여명’을 말한다. 이는 인간은 빈곤의 존재이며, 미래를 동경해 찾아 나서는 충동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충동의 근원은 굶주림이고 배고픔이다. 프로이드의 성도, 무의식도 굶주림에 비하면 사치일 뿐이다. 그는 한밤의 꿈에만 매달렸고, 완결된 꿈에만 매달렸으나 블로흐의 꿈은 한낮의 꿈이었고, 유의식의 꿈이었으며, 더 나은 삶의 꿈이었다. 이를 그는 "주어는 아직 술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3부는 ‘이행’으로 ‘거울 속에 나타나는 소망의 영상들’을 드러내 보인다. 여러가지 진열, 동화, 여행, 영화, 연극 등은 희망의 흔적이다. 희망의 주관적인 내용이 ‘선취하는 의식’(의 ‘아직-아니 있음의 존재론’)이라면, 희망의 객관적인 내용은 인간의 삶 속에서 (특히 사회적 삶과 역사적 삶 속에서)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입증되는가를 밝혀주는 소망의 영상들이다.
4부는 ‘구성’이라는 말로 통합될 수 있는 ‘선한 새 것’에 대한 희망의 증거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플라톤에서 프루동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건축적 그리고 지리적 유토피아와 함께 문학, 철학, 예술을 포괄하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더 나은 세계를 목적으로 하는 이 유토피아가 바로 ‘구체적 유토피아의 실천’이다. 그 실천은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통속적 맑스주의의 방법이 아니라, 아직 어느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참 역사의 장인 ‘희망의 미학’으로 가능하다.
마지막 5부는 ‘동일성’으로 실현된 인간 삶이 가지는 소망의 상들이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 음악과 예술, 죽음, 종교, 아침의 나라, 자연, 지고의 선 등의 상이다. 이 상들은 역사의 종말에서 완전성을 드러내는 인간의 본래적인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의 상들에 대립되는 극단적인 비유토피아는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과 연관된 희망의 상은 부활과 천국, 나아가 영혼의 영생을 가능케 하는 영성들이다.
‘희망의 원리’는 마지막 장에서 맑스와 인간성 문제를 다룬다. 인간 본성의 풍부함을 인간과 자연의 잠재성-경향성으로 해석하여 인간은 아직도 역사 이전의 역사 속에 있고, 만물 역시 세계창조 이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는 이제 노동하는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선언한다. 블로흐는 이런 총체적인 인류문화사를 통해 아직-아니 이루어진 인간 희망의 내용을 백과전서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세계문화사 전체를 관통하여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고 그려낼 수 있도록 한다.
20세기에 들어 독창적인 철학언어를 창조한 철학자로 하이데거와 블로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중 블로흐는 역사의 변증법적 존재론을 미래 인간의 형이상학적 언어로, 음악을 통해 그리고 (표현주의)문학을 통해 만들어 표현하고자 했다. 수 십년을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 당대의 명저가 이번에 우리말로 완역된 것은 우리 철학계의 일대 ‘사건’이라 할만하다. ‘희망의 원리’를 탐독하고 사려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 그리고 그 미래의 새 사람을 약속하는 것이다.
백승균 계명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