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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사랑이라기 보단 일탈의 떨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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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사랑이라기 보단 일탈의 떨림이었지

입력
2004.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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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 발행·9,000원"떨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솜털의 떨림 같기도 운명의 떨림 같기도 한,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을 비밀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사진)씨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가치’로 여기는 그 비밀 한 자락을 풀어놓았다. 낭만적 진실과 소설적 허구의 교직인데, 어찌됐든 자전적 연애소설로 읽고 싶은 장편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발행)이다. 허물어진 시가지의 풍경보다 더 심란하고 팍팍했던 한국전쟁과 휴전 어름, 생존의 이해를 벗어난 감정이 사치였던 그 시절 ‘나’에게 ‘청춘’을 느끼게 해 준 이가 있었다. 외가쪽 먼 친척이고 ‘나’보다 한 살 어린 첫사랑의 ‘그 남자’다.

소설은 사랑이라 하기에는 왠지 속(俗)스럽고 교분이라 부르면 싱거운, 그런 풋풋함으로 시작된다.

‘나’는 건실하고 모범적인 은행원을 만나 결혼을 하지만, 좌절된 첫사랑의 아픔에 힘들어 하는 남자와의 만남은 장바구니 데이트로 이어진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신문에 연재되고, 전후의 야릇한 활기가 성적 에너지로도 이해되던 시절이었다.

‘남들 연애와는 다르다’는 묘한 우월의식과,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던 성적 긴장감… ‘그 신열 같은 일탈의 떨림은 남자의 실명(失明)으로 중단된다.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만난 남자는 첫사랑 앞에서 만큼은 성한 사람처럼 굴고 싶어하고, 그 미워할 수 없는 꾸밈 앞에 ‘나’는 모진 말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당당해지라고 꾸짖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육친애적 사랑’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좀체 들뜨는 법 없는 작가 특유의 문체와 50년 저쪽과 이쪽을 오가며 데우고 식히는 서사의 교차는 두 사람 만남의 아슬아슬한 대목에서조차 한치 감정적 잉여의 틈을 안준다.

그렇다고 고리텁텁한 훈계조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젊은이들의 분방한 만남을 두고 나이 든 ‘나’가 상상하는 한 대목.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그런데 왜 낭비를 못하셨어요?" 하나마나한 질문에 박완서 씨는 "내 천성 탓이기도, 시절 탓이기도 했겠죠"라며 웃었다. 소설에는 남자들이 귀하던 그 시절 여인들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작가의 쫀쫀한 기억을 통해 풍속사나 사회사로 읽어도 좋을 에피소드들로 재현됐다.

함지를 이고서야 굽은 허리가 빳빳해지던, 해서 골병이 드는 줄도 몰랐던 여인네들의 삶. ‘나’의 친정어머니나 춘희의 노모, ‘그 남자’의 어머니의 삶이 그랬다.

어린 가장으로 미군부대를 드나들며 돈을 벌다가 종당에는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양색시로 살아야 했던 춘희며, 월남전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내리 세 딸을 장애아로 낳아야 했던 피붙이 광수 등도 그들이다.

‘그 남자’ 어머니의 장례식 직후. ‘돌아가시고 새 옷 갈아 입혀 드릴 때 와이프가 내 손을 끌어다가 남자 빤스 고추 구멍을 만져보게 하는 거야…정말 내 빤스였어. 흐느끼는 남자를 ‘나’는 가만히 끌어안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나’가 안은 것은 그 시절과 그 시절의 인연들이었고, 작가가 세월과 연애를 하렸던가 싶어지기도 한다.

오래 감추고 아껴뒀던 ‘비밀’을 털어놓은 탓인 듯, 박완서씨는 "참 허전하다"고 했다. 깊은 포옹을 푼 뒤는 늘 헛헛하지 않던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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