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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낙관적으로 역사보기

입력
2004.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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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가정(假定)이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다. 틀에 박힌 시각을 벗어나 보다 유연하게 시대를 보는 방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온통 못 살겠다는 원성이 지금 하늘을 찌르는 판이니까 이런 가정을 해보면 어떨까. 지난 번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고 한나라당이 집권당이 됐다면. 그러면 지금보다는 한결 나은 세상이 돼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변화의 수용 능력이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새삼 돌이켜 보면 2002년 월드컵은 87년 6월항쟁 이후 또 한번 시대를 구분지은 사건이었다. 국민들 스스로 더 이상 사회 속에 파편화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뜻을 모으면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하자면 능동적 대중에의 통렬한 자각이 월드컵의 사회적 의미였다. 이런 자신감은 억눌려왔거나 표현기회를 얻지 못했던 온갖 다양한 의견과 변화욕구들을 거침없이 폭발시켰다. 사회는 기존의 틀로는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전통적 지도자상에 가까운 이 후보나 오랜 타성에 물든 한나라당으로선 받아들이기도, 감당키도 힘든 급격한 변화였다. 그러므로 한나라당이 집권했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어쩌면 민란 수준의 총체적 혼란에 휩싸여있을 지 모를 일이다. 노무현 정권을 역사의 필연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을 확장하면 우리 현대사도 다르게 보인다. 해방 후 남한 단독의 자본주의정부 수립과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은 현재 북한주민의 처지와 비교할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쉴만한 선택이었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에 한참 뒤져있던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등장은 국가생존과 빈곤 탈출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됐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 조차도 시동이 걸린 경제엔진을 더욱 가열해 국가경제가 일정 속도에 오르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심지어 가장 유약했던 노태우 정권도 바로 그 아무것도 하지않았다는 점 때문에 역설적으로 역사적 역할을 해냈다. 앞선 거대권력의 공백을 적당히 메워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주사회로의 이행에 완충기능을 한 셈이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집권 가능성을 아예 뿌리뽑아 문민정치의 기반을 확실하게 다졌고, 김대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고착화한 사회의 지배적 구조와 가치를 어느 정도 바꿈으로써 한국을 한층 열린 사회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렇게 보면 우리 현대사는 국가발전에 필수적인 제 단계를 교과서적으로 밟아온 과정이다. 적지않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역사이지, 자학할 만한 역사는 결코 아닌 것이다. 현 정권을 보는 시각도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 살림살이가 힘들고 정신이 산란하지만 압축발전 과정에서 쌓일 대로 쌓인 갈등을 시원하게 분출해보는 시기 또한 필요했다고 보면 그만이다. 이쯤에서 이렇게 수증기를 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끓는 물의 주전자 뚜껑이 튕겨나가듯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 역사에 작용하는 선의를 믿는다면 우리는 또 한번 거뜬하게 통과의례를 거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현 정권에서는 조급하게 안정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일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경험할 만한 것은 다 해보고, 온갖 가치와 이념의 실험도 끝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안정된 실용주의 뿐이다. 차기는 그런 성격의 정부가 역사에 의해 선택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정신차리고 열심히 공부할 일이다. 이념적 성향이나 운동경력 등이 아닌, 오직 현실적 실력을 갖춘 이들만이 인정 받는 시대가 곧 올 것이므로.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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