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은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지역 10곳을 뽑아 십승지(十勝地)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속리산 자락인 충북 보은군의 구병마을입니다. 겹겹의 산들로 둘러싸여 수없이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찾을 수 있는 곳, 전쟁의 기운마저 가다 지쳐 포기하는 오지의 땅입니다. 이렇게 꼭꼭 숨어 지내던 마을이 최근 도시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을 맘껏 나눠줄 테니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쉬었다 가라고 말입니다.속리산국립공원 구역의 제일 밑자락, 호쾌한 풍경의 삼가저수지를 끼고 좁은 길을 내처 달렸더니 우람하고 잘생긴 소나무들이 이룬 작은 숲이 객을 맞는다. 구병마을 입구의 송림원이다.
음식점 하나를 지나 작은 언덕을 올라서니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며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뒤로는 구병산이 아늑하게 감싸안고, 앞으로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풍경에 "어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구병산이 보듬은 장수마을
구병마을은 십승지답게 한국전쟁 전후로 피란민들, 특히 월남인들이 몰려들어 한때 70, 80가구가 넘게 살던 작지 않은 산골이었다. 이 때문인지 주민들 말투에는 충청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이북 억양이 녹아있다. 화전농들이 떠나면서 지금은 27가구만 남아있다.
구병마을은 장수마을로 이름이 높다. 4,5년 전만 해도 9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한 집에 한 명씩은 있었다. 지금 그 세대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고 바로 밑 세대인 60, 70대들이 윗자리를 차지한다.
임희순(58) 이장은 "구병리가 있는 해발 450m의 위치가 사람 살기에 딱 좋은 높이라 합디다. 깊은 산이라 공기가 달고, 특히 물 맛이 기가 막힙니다. 구병마을에 와서 실컷 물만 먹어도 수명이 길어질 것입니다"라고 자랑했다.
주민 모두 농사를 짓지만 마을에는 논이 없고 감자 옥수수 콩 고추 메밀 등 밭농사 뿐이다. 그 밭도 경사가 급하고 돌이 많은 까닭에 트랙터를 쓸 수 없어 아직도 소를 이용해 밭을 간다.
마을 앞마당에는 펜션타운이 들어서 있다. 향촌리 강촌리 안채 사랑채 등 저마다 고운 이름을 가진 6개 동의 통나무집이다. 올해 5월 준공된 것으로 니스칠을 하지 않아 나무 냄새를 진하게 맡을 수 있다. 주민들이 공동 운영해 구병리 마을 체험객들을 위한 숙소로 쓰는 곳이다.
통나무집 한 켠의 황토볼 발바닥마사지길. 30여m 되는 길에 구슬만한 황토볼이 가득 깔려있다. "발바닥 마사지가 뭐 별거겠느냐"는 생각에 직접 들어가 봤다. 하지만 황토볼이 발바닥을 콕콕 찔러대는 게 고통이 만만치 않다. 발바닥은 찌릿찌릿, 뒷골은 번쩍번쩍. 겨우 ‘완주’ 하고는 평상에 앉아 황토를 털어내는데 아팠던 발바닥이 시원해지면서 온 몸이 상쾌해진다. 금세 "한번 더 걸어볼까" 욕심이 생긴다.
마을을 도는 돌담길은 훌륭한 산책로다. 나무기둥의 황톳집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대추나무 감나무에는 잘 익은 열매가 늘어져 있다. 감을 따던 아주머니
한 분이 불러 세워 홍시가 많이 익었으니 하나 들고 가란다. 마을의 인심도 후덕하다. 억새와 개미취 등 들꽃이 지천인 마을 위에 올라서니 앞산 기암절벽 너머 멀리 속리산 천황봉까지 한 눈에 들어오고, 연봉에 연봉 몇 겹을 포갠 산자락들이 장엄하게 물결친다.
◆황토볼 발바닥 마사지길 '찌릿찌릿'
구병마을의 자랑거리는 청정자연과 그 곳에서 얻은 토속 음식. 올 봄에 산나물, 산딸기 채취 축제를 열었고 얼마 전에는 가을을 맞아 메밀꽃 축제로 많은 이들을 불러 모았다.
구병마을의 농촌체험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농사철에 맞춰 감자 캐기, 옥수수 따기, 나물 캐기 등 주민들과 함께 수확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또 계절과 상관없이 두부 메밀묵 메밀국수 만들어 먹기, 메밀베개 직접 만들기, 떡메치기 등은 사철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마을 안에는 주로 구병산 등산객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이 4군데 있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주 메뉴는 메밀묵, 손두부, 감자부침,칼국수 등. 마을에서 직접 재배한 재료만 사용해 소박하지만 맛이 깊어 입에 척척 감긴다. 값도 싸다.
경부고속도로 청주IC에서 나와 청주시를 거쳐 보은 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대야리에서 37번으로 갈아타고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정이품송 조금 못미쳐 갈목리에서 505번 지방도를 타고 삼가저수지를 끼고 달리다 삼가리를 지나면 구병리가 나타난다.
/구병리(보은)=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구병마을-술자랑
체험프로그램 참가신청이나 펜션 예약을 받는 구병마을 홈페이지 주소는 www.sulsul.org. '술술'이다. 이곳 체험마을 운영을 맡고 있는 김경환(33)씨는 "구병리는 각 집마다 십여 가지의 가양주를 빚어 귀한 손님에 대접하는 술익는 장수 마을"이라며 "산에서 나는 산딸기 매실 보리뚝 마가목 오미자 다래 오디 산사 솔방울 등을 그 재료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병마을에는 전국에 이름난 술이 있으니 바로 송로주(松露酒)다. 소나무의 옹이를 생밤처럼 깎아 멥쌀 누룩 솔잎 봉령 등과 섞어 빚어낸 48도의 독한 술이다. 특유의 솔향이 진하고 관절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충북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술로 마을 입구 송로주 공장(043-542- 0774)에서 제조과정을 견학할 수 있다.
◆구병마을-산자랑
구병마을의 뒷산 구병산(876m)은 아홉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비록 속리산에 가려져 있지만 화려한 산세와 원시림에 가까운 숲, 뛰어난 조망 등으로 등산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보은군은 이 구병산과 속리산을 연결하는 등산로를 인위적으로 개발해 '충북 알프스'라 이름 짓고 1999년부터 개방했다. 구병산-형제봉- 천황봉-관음봉-상학봉을 잇는 43.9km 길이로 화려함과 장중한 맛을 겸비한 절경의 코스다. 구병마을에서 구병산을 오르기는 어렵지 않다. 짧게는 1시간, 길게는 5시간 정도의 잘 정비된 산행코스가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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