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 아파트에 SW 둥지 틀다지난 회에서 삼보컴퓨터 설립 과정과 초기의 인력 구성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다. 나는 삼보라는 내 회사를 세우기 전에 전자기술연구소(KIET) 등 국가 기관에서 오랫동안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이를 놓고 이런 저런 오해와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연구소 덕에 내가 사업에 쉽게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연구소의 유능한 인력을 마음대로 빼 내 갔다고 생각한 이들도 많았다. 개발 노하우와 맨 파워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써 먹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삼보를 설립할 때 나는 KIET 등의 연구원과 기술자는 단 한명도 스카우트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김종길 사장은 금성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채용했다. 공동대표인 이윤기 사장은 과학기술연구소(KIST)의 행정직을 맡다가 동양전산 전무를 거쳐 삼보에 합류했다. 강진구 부사장은 KIST 통신장비 개발 부서에서 근무하다 민간 기업으로 갔다 삼보에 들어왔다. 기술자도 내 밑에 있던 사람은 한 명도 뽑지 않았다.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게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보에서 만든 컴퓨터를 파는 일은 엘렉스라는 신설 회사가 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조 회사인 삼보컴퓨터와 판매 회사인 엘렉스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판매 가격을 놓고 서로의 논리를 앞세워 티격태격 했다. 나는 결국 엘렉스와 삼보컴퓨터를 통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소프트웨어를 맡은 한국소프트웨어연구소(KSI)까지 한 회사로 합쳐 버렸다. 83년 겨울이었다.
KSI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우리나라는 어차피 수출을 해 먹고 사는 나라다. 때문에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도 수출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소프트웨어는 다행히 규모가 작아도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나는 적은 인원으로 조그만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처음부터 수출 제품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대학 동창이자 절친한 벗인 김성운 박사는 고려대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김 박사는 가족이 미국 보스톤에 살아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를 했다. 나는 김 박사 설득에 나섰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너댓명 구해 줄 테니 이왕 비어 있는 김 박사 아파트에 상주시켜 컴퓨터를 개발케 하고 해외 판매 업무도 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 박사는 매우 뛰어난 통계 물리학자 였다.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길 가능성이 많았다. 나도 그런 그를 장사꾼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학자의 길을 내 마음대로 막을 수도 없었다. 그는 영어를 아주 잘했고 가족을 만나러 미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두 가지 점을 활용하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도 미국시장을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 박사는 "나보고 직접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라고는 하지 말아라. 나는 그럴 흥미도 시간도 없다"고 자락을 깔았다. 그 대신 "미국의 내 친구 중에 벤처 캐피탈리스트가 있다. 주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많이 알고 있으니 판매 루트를 찾아보는 건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김 박사 아파트는 한국 최초의 소프트웨어 수출 업체의 연구실이 됐다. 나는 수출이 가능한 소프트웨어 목록을 정리해 엔지니어들에게 개발을 권했다. 동시에 김 박사에겐 수출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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