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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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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입력
2004.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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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권의 큰 착각 하나는 자신이 한나라당과 비대신문의 수구 신성동맹으로부터 영일(寧日) 없이 두드려 맞는 이유가 여권과 신성동맹 사이의 이념적·정책적 차이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최근 생뚱맞은 물타기로 개혁 법안들을 멀겋게 만듦으로써 그런 시각을 또렷이 드러냈다. 그러나 웬걸, 신성동맹의 공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신성동맹이 여권을 두드려 패는 이유는, 적어도 결정적 이유는, 이념이나 정책 층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2002년 대선과 올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겼더라도, 지금까지 현정부가 펼쳐온 정책과 크게 다른 처방을 선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인들 무슨 수로 지금 정부보다 더 화끈하게 대미 종속과 가진 자 옹호를 실천하겠는가. 정권 출범 당시에야 여권과 신성동맹 사이에 이념 차이가 없지 않았겠지만, 이 정부는 지난 한 해 반 동안 그 차이를 실천으로 입증한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신성동맹은 왜 여권에 끊임없이 말의 팔매질을 해대는가? 여권의 존재 자체가 그냥 싫기 때문이다. 마땅히 자기들이 꿰차야 했을 자리를 잇따른 선거 패배로 빼앗긴 것이 짜증스럽고, 게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평소에 깔보아왔던 무지렁이들이라서 더욱 짜증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정권이 같잖다는 것이다. 여권에 대한 신성동맹의 감정은 맞수에 대한 미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가당찮은 멸시의 감정이야말로 멸시하는 주체의 천격(賤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접어두자. 아무튼 신성동맹이 바라보는 현 정부는 프랑스 왕당파 귀족들이 바라보았던 제1제정과 비슷하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 역시, 코르시카의 미천한 신분 출신 황제처럼, 근본 없는 집안 출신의 ‘왕위 찬탈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동맹이 여권을 지칭하며 애용하는 ‘좌파’라는 말도 ‘그냥 싫은 놈’이라는 뜻일 뿐이다. 신성동맹이 이런 알량한 귀족주의로 여권을 대하고 있는 이상, 이 정부가 설령 가상의 한나라당 정권 이상으로 우향 돌진한다고 해도 이른바 ‘상생’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여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신성동맹이 싫어하도록 내버려두고 제 갈 길 가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지자들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신성동맹 눈치를 살피느라 끊임없이 우경화의 길로 매진함으로써 제 지지기반을 허물어왔다. 그러다가 사면초가다 싶으면 사소한 ‘껀수’를 잡아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신성동맹과 각을 세우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의 조잡한 정치공학을 되풀이해 왔다.

여권이 무슨 일을 하든 신성동맹이 거기 딴죽을 걸 준비가 돼 있는 한, 신성동맹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적 유권자들이 여권의 새로운 지지자로 충원될 가망은 거의 없다. 여권이 살 길은 정권 출범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며 두 차례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다. 게다가 출범 이래 줄곧 좌파 정권이라는 ‘욕’을 들어온 바에야, 본때 있는 좌파는 못 되더라도 좌파 흉내쯤은 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개혁 피로증? 만약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신성동맹의 악선동 때문만이 아니라 아무런 실천 없이 허공에 지겹게 난무하는 여권의 개혁 담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개혁은 개혁이라는 구호 안에 있지 않다. 지금 개혁 법안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슨 대단한 공사가 아니라 그저 우리 사회를 정상화하는 최소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여권이 이 정도 일을 하면서 입으로 개혁 유세(有勢)를 떨어 덤의 반발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온건할수록 좋고, 실천은 어기찰수록 좋다. 지난 대선 때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2007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 후보 찍을까 아니면 기권할까 고민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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