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과거사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등에 대해 당론을 확정하고 이를 ‘개혁’의 이름으로 관철시킬 것을 거듭 다짐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로 들어서면서 언제부터인가 개혁이라는 어휘의 신선함이나 가슴떨림이 사라진 지가 오래되어서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도 열린우리당이 ‘개혁’ 입법 운운하며 개혁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개혁이 우리 사회에서 유용한 덕목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바꾸어 새롭게 하겠다는 개혁에 반대할 국민이 어디 있는가.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국민들이 좀더 편안하고 안정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다. 잘못 바꾸어 불편해지고 불안하다면 개혁이 아니고 개악인 셈이다. 따라서 4대 쟁점사안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열린우리당이 당론을 확정하면서 개혁 입법으로 설정한 것이 개혁 독점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길 바란다. 그들만의 주장이 개혁이고 ‘그들의 개혁’에 반대하면 반개혁의 딱지를 붙이겠다는 생각이라면 이야말로 개혁의 대상이다.
개혁을 내세워 대결구도를 만들고 이를 돌파하여 승리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강제로 압축해 대결구도로 만들어 옥죄어서도 곤란하다. 쟁점이 되고 있는 4개 법안은 국가안보, 인권, 교육, 언론, 정체성과 정통성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떠받치고 있는 법안이기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한 사안이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집권당은 진정 ‘열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보안법 폐지보다는 개정을 통한 존속을 원하는 국민이 70~80%에 이른다면 이러한 견해를 수렴하고 따르는 것이 순리다. 국가보안법 조항 중 인권 침해의 가능성이 있는 조항은 과감히 삭제하되 우리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공통된 의견이 아닌가.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우려가 불식되고 남북 관계 개선과 북한의 변화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이 충분히 달라질 때 완전 폐지를 공론화해도 늦지 않다는 여론을 애써 무시하려는 의도를 모르겠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그리고 사회원로그룹의 의견도 반개혁의 목소리로 몰아세울 셈인가.
‘열린’ 자세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국정감사 기간에 서둘러 당론을 결정하고 발표하는 모습이 왜 그리도 초조해 보이고 여유가 없어 보이는지 안타깝다. 총선에서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고 탄핵 정국이 마무리되었을 때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보여 주었던 자신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열린우리당이 스스로를 소수 비주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열린우리당은 국민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헤아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고쳐서 새롭게 할 것과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를 분명하게 판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 해치워야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야당과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타협을 끌어내려는 신중한 자세를 보일 때 여론은 반전될 수 있다.
쟁점 법안은 정기 국회 이후로 미루어 놓고 정기 국회 동안에는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정기 국회 일정으로 바쁘겠지만 주말을 이용해 ‘경제 살리기 철야 의원총회’라도 열어야 진정 집권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당장 의도하는 바를 얻지 못하더라도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되찾을 수 있고 추후 더 많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포석이다.
더 이상 밀어붙이기 정치는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추진된다 해도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개혁 독점 시대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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