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독재정권을 돕거나 인권 탄압을 방관하던 단체들도 지금 민주적 권리를 한껏 누리고 있다. 정권을 맡은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들의 자유를 좀 제한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지만 국민에게 물어 봤더니 괘씸하더라도 그런 자유를 허용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역사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4일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던 해외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경력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지만, 듣기 민망한 소리다. 농담이었다 해도 적절치 않다.
물론 그는 "보복하려는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도리"라는 말도 했다.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을 하고 있다"는 설명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의 자유를 좀 제한하고 싶지만"이란 말을 덮기 어렵다.
또 노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느냐고 화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대통령의 속마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말꼬리를 잡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주장해 왔는데 아직도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우선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군사정부가 막을 내린 지 벌써 12년이 흘렀고, 상징적인 민주 투사 두 사람이 이미 대통령을 역임했다. 노무현이란 이름을 김영삼, 김대중에 버금가는 민주투사로 기억하는 국민은 없다. 그가 인권변호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세우면 오히려 초라해진다.
그는 민주투사 이후의 젊은 지도력을 요구하는 시대 흐름을 타고 대통령이 됐다. 그는 민주화의 산물이지 민주혁명으로 집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지 못한 채 모호한 정체성으로 헤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 대 반민주’ 등의 시대착오적인 슬로건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지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피 흘려 투쟁한 덕에 너희들이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으냐"고 혹시라도 생각한다면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스스로 모독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반대할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의 멋진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독재정권에 협조했거나 그 일원이었던 사람들이 오늘 과거에 사용하던 똑 같은 슬로건을 외치며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국민 입장에서 못마땅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유를 좀 제한하고 싶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도 아무런 제약 없이 민주적 권리와 인권을 한껏 누리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역사가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있다.
과거사 규명, 국가보안법 폐지, 교육 정책과 경제 정책 등에서 불필요한 대결구도가 설정되고 그로 인한 갈등이 국민을 갈라놓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엘리트와 비엘리트, 보수파와 진보파, 강남 거주자와 비강남 거주자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갈갈이 찢겨 대결을 강요당하고 있다. 진정한 토론은 사라지고, 본질은 실종된 채 아군과 적군의 요란한 공방전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노 대통령에게 있다. 노 대통령은 상당 부분 대결구도를 통치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나라와 국민 전체를 아우르기보다 ‘내 편’ 얼마만 확보하면 이길 수 있다는 선거전략이 집권 후 통치전략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대나 비판은 적대시할 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역사의 불공평함’에 대한 노 대통령의 단상은 한국의 민주화를 자랑하기 위한 색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노 대통령 특유의 돌출발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일지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념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빨리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미래, 자신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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