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기름보일러에 밀려났던 연탄이 극심한 경기 불황에 고유가시대를 맞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기름이나 가스 난방을 하지 못하는 달동네뿐만 아니라 이젠 제법 번듯한 단독주택 동네마저 연탄을 다시 찾는 가정이 늘고 있다. 연탄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난방이나 취사용 연료로 서민들의 생활 필수품이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일대에서 25년간 연탄을 배달해 온 이정애(48·여)씨. 그가 바라본 2004년 10월의 ‘연탄이 있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15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삼천리 연탄공장. "한 장당 450원인 연탄이 요즘 경기가 워낙 불황이다 보니 달동네는 오히려 주문이 줄고 있고 양옥식 주택에서 간간이 주문을 해 오고 있어요." 70년대 후반 신혼시절부터 남편과 함께 연탄 배달을 해 온 이씨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연신 쏟아져 나오는 연탄을 1.5톤 트럭에 실은 뒤 시동을 걸었다. 남편은 연탄배달로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IMF 외환위기 때 막노동으로 전업했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택이 즐비한 언덕배기를 돌아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가자 언덕 한 구석에 김종웅(74) 할아버지의 허름한 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씨는 "할아버지가 자식들 사업자금 대 주느라 재산을 모두 내 준 뒤 주인이 따로 있는 땅에서 창고를 개조한 8평 남짓한 방에서 할머니와 살고 있다"면서 "10년 전부터 이 집에 연탄을 대고 있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얼마 전 경비직에서 해고됐고, 할머니가 인근 학원에서 청소일 등을 하며 버는 45만원이 생활비의 전부다. 김 할아버지는 "국가 지원은 바라지도 않지만 취직자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그만 희망을 털어놓았다. 자녀들 소식을 물어보니 손사래를 치며 말을 피한 뒤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를 주머니에서 꺼내 값을 치렀다.
이씨는 다음으로 ‘계단집 할머니댁’을 향했다. 풍을 맞아 몸져누워 있는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간병하고 있으며, 같이 사는 30대의 딸이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 벌어오는 10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죽을 떠먹이던 할아버지는 연탄차 소리에 문을 열고 나와 50여장의 연탄을 받아 집 한쪽에 세워놓았다. 그는 "딸 월급날이나 돼야 연탄을 또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라며 "할멈이 좀 나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라고 혀를 찼다.
이씨는 이어 ‘성북동 할머니’와 통화를 한 뒤 다시 차를 몰았다. ‘성북동 할머니집’은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지붕에서는 빗물이 새고 한쪽 벽은 허물어져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할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버려진 종이 상자를 주워 생계를 꾸려 나간다. 할머니는 이씨를 보자마자 푸념부터 늘어놓는다. "하루 종일 상자 주워봐야 1만원도 벌기 어려운데 막노동을 하며 살림을 보태던 마흔 넘은 아들이 요새는 새벽에 나갔다 일감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다반사"라며 하소연했다.
마지막 배달처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손모(60)씨의 32평 단독주택이었다. 이전 배달처와는 달리 고유가 시대를 맞아 새로 편입된 이씨의 고객이다. 손씨는 연료비를 70~80%가량 줄일 수 있는 연탄보일러로 바꿨다. 창고에 연탄 700장을 들여놓은 손씨는 "이 동네에서 연탄 보일러를 쓰는 유일한 집이기 때문에 연탄재 처리가 번거롭긴 하지만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아니냐"고 했다.
이씨의 단골 고객은 10여집. 날을 잡아 하루에 3~4집, 1,000여장을 배달한다. 배달하는 연탄 양이 지난 겨울에 비해 10%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이 날 배달을 모두 마친 이씨는 "전에는 단골 손님이 기름보일러로 바꾸었다고 하면 섭섭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잘살게 됐다는 생각에 흐뭇했다"면서 "그런데 최근 불황이 심각해지면서 거꾸로 연탄 판매 수입은 늘어 좋지만 국가경제는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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