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시안 정부…2,900만弗 차관도 헛탕우리나라는 과거 40년 동안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룩했다. 모든 산업이 그랬지만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빠르게 진행됐다. 변화는 기회를 낳는 법이다. 정보 산업을 하는 내 앞에는 수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좌절 또한 숱하게 맛보았다.
그 중 하나가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경우였다. KIET는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부의 인식 부족으로 큰 뜻을 펴지 못했다.
사연은 이렇다. 1977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정부는 이에 앞서 전자공업 부문의 기술개발 계획을 세계은행이 의뢰했다. 그 일은 세계은행의 막디 이스칸다 박사가 맡았다. 그는 한국을 전자공업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의 인큐베이션 센터를 만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를 위한 참 고마운 얘기였다. 한국은 개발도상국 이지만 전자공업 분야만은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나 세계은행 내에서 암초를 만났다.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을 일으킨다는 건 선진국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인데, 후진국을 돕기 위해 설립된 세계은행에서 이런 일을 추진하는 게 적합한 일이냐는 이유로 세계은행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이스칸다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반대론자들을 설득, OK 사인을 얻어 냈다. 한국으로서는 은인인 셈이다. 그는 선진 기술을 빨리 익히기 위해서는 인큐베이터 센터가 절실하다고 여겼다. 기술과 경험이 없는 한국 기업들이 제품을 개발한 뒤 시장에서 실제로 제품을 팔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급선무라 생각했다. 이렇게 팔아보고 난 다음 자신이 붙으면 자기 공장을 지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세계은행은 이를 위해 2,900만 달러를 한국에 빌려 주었다. 한국 정부는 똑 같은 금액을 매칭펀드 형태로 투자키로 협약을 맺었다. 기자재 구입과 연구원 교육 또는 외국 기술자 초빙 비용은 차관을 쓸 수 있었지만 연구원 월급 등 운영비는 차관에서 전용(轉用)하지 못하고 국내 투자로 충당토록 했다. 때는 1979년 6월이었다.
나는 이 사업의 주무 기관인 KIET의 컴퓨터 담당 부소장이었다. 2,900만 달러는 상당히 큰 돈이었다. KIET가 기술을 도입하고 컨설턴트를 위촉하고 기술자를 훈련시키고 장비를 사는데 충분한 액수였다.
그런데 한국 정부에서 약속을 어겼다. 돈을 제대로 내놓지 않았다. 매칭펀드에는 건축비와 직원 급료, 국내 부품 구매 비용 등 운영비가 포함돼 있었지만 돈이 나오지 않으니 외국 장비를 사도 넣을 건물이 부족해 창고에 쌓아두는 일이 빈번했다. 월급이 적어 유능한 연구원을 확보하는데도 비상등이 켜졌다. 경제기획원에 달려가 애원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공무원 중에는 우리나라가 컴퓨터와 반도체 사업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가 드물었다.
어떤 예산 담당자는 "화학 전문가는 화학이, 기계를 전공한 사람은 기계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박사도 지금 컴퓨터가 제일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느냐. 기술자들은 다 그렇게 얘기한다"고 말했다. 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달라는 대로 다 주면 현재 예산의 5배가 있어도 부족하다고 푸념하는 공무원도 있었다. 내가 컴퓨터 개발에 모든 정성을 쏟지 못하고 서울시 지하철 프로젝트 같은 ‘부업’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