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11일 양일간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와 국가행정학원에서 한국의 동북아공동체연구원, 중국의 사회과학원, 일본의 화평안전보장연구소 등 세 나라 싱크탱크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일보 등이 후원한 ‘제1회 한중일 민간 고위급 평화보장 및 안전보장 포럼’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삼국에서 100여 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이번 회의는 군사·안보, 경제발전, 외교, 언론 등 네 영역에서 삼국 간 협력 확대를 모색하는 좋은 기회였기에 몇 가지 느낀 점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이틀 내내 회의장을 휘감았던 것은 삼국 간의 관계를 내리누르는 버거운 역사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함께 만들어야 할 미래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더 이상의 오해와 갈등을 수용할 여력을 어느 한쪽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한 넓은 합의도 느껴졌다.
특히 중·일 관계의 어려움이 궁극적으로는 1919년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이 기존 독일 소유 산둥반도 권익의 승계 등 중국에 대하여 21개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는 와타나베 아키오(渡邊昭夫) 화평안전보장연구소 이사장의 진솔한 반성은 귀담아들을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중, 일 삼국이 전에 없는 수준의 ‘역사논쟁’에 휘말리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되었다. 기존의 논쟁에 더하여 ‘고구려사 문제’(동북공정·東北工程 논란)가 한·중 간의 ‘포괄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교착상태에 빠뜨릴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국의 ‘신민족주의’, 중국의 ‘대국주의’ 그리고 일본의 ‘신국가주의’ 등에 대한 우려도 표출되었는데 특히 일본의 ‘정상국가’로의 전환 여부 그 자체보다는 과연 ‘어떠한’ 정상국가가 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지적은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 중, 일 삼국 간에는 전에 없는 수준의 협력을 위한 토양이 배양되었으며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점에도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참석자 모두가 동의했던 것은 북한 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있기 전에는 동북아에서 진정한 협력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중국 공산당 당교(黨校)의 장리엔쿠이(張璉鬼) 교수는 6자 회담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으며 중국의 ‘설득’이 주효하지 않을 경우,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중국 또한 북한 제재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국은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 삼국은 과연 하나의 일관된 합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회의 내내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중·일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소위 ‘경제적으로는 뜨거우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찬 기운이 도는(經濟熱 政治冷)’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에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갈등을 대표하는 일본과 중국이 함께 강성했던 시기는 별로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현재의 상황은 상당히 특이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소위 ‘자유무역협정(FTA) 패권 경쟁’으로 불리는 중·일 간의 역내 경쟁의 지양이 요구되었던 것은 귀담아 들을 만했다. 특히 부상하는 중국에 대해 일본이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이에 대비해 미국과의 동맹을 당연시하는 추세는 미·일 동맹의 약화만이 동북아 협력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시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예상 외로 흥미 있었던 것은 언론 관련 세션이었다. 삼국의 언론인들이 각각 다른 나라에 대한 보도의 정서(情緖)에 대해 논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특히, 최근 불거진 한국의 ‘핵’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더 나아가 삼국 간 언론 정보 교류에 대한 필요성의 제기 또한 상당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으며 일반 국민들이 언론을 통해 갖게 되는 다른 나라에 대한 인식의 정도를 감안할 때 실제로 그러한 연계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매우 크게 느껴졌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익에 기반한 상호의존의 구조는 이미 상당히 잘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호의존의 증대가 반드시 국가 간의 신뢰와 진정한 협력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기에 이제는 단순한 이익의 구조를 넘어서 규범에 입각한 협력의 관계가 자리잡도록 제도적 통합의 폭과 사고의 실험을 보다 늘려가야만 할 것이다.
지역협력의 우선순위에 대해 합의하고 과감히 세력균형 위주의 정책을 넘어서 ‘이웃의식(隣居意識)’에 기반하여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민간대화의 제도화가 보다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선민후관(先民後官)’의 방식으로 동북아의 협력이 제고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이번 회의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정재호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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