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딱지 곰팡씨 / 레이먼드 브릭스 글ㆍ그림, 조세현 옮김 / 비룡소 발행ㆍ9,000원밥 먹기 전에 이 책을 봤다간 밥맛이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몽땅 나오는, 그야말로 악취가 진동하는 책이므로.그런데, 아주 멋있고 몹시 재미있다.
똥이니 방귀니 하는 말만 들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꼬마들은 낄낄 웃느라고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어른들은 짐짓 점잔을 빼면서 읽다가 몇번씩 무릎을 치며 감탄할 것이다. “으으, 이렇게 지저분할 수가! 하지만 정말 환상적이야. 게다가 정말 철학적이군!”라고.
‘괴물딱지 곰팡씨’는 영국의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70)가 1977년 출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웃음이 터진다. 엉뚱한 상상력과 예리한 풍자,반짝이는 유머를 깊은 사색으로 반죽한 걸작이다.
말풍선과 칸막이 그림의 만화책 기법을 접목한 이 책의 주인공은 어둡고 축축한 땅 속 괴물딱지 나라의 곰팡씨. 주름진 초록색 피부에 긴 혀, 손과 발에 물갈퀴가 달린 괴물딱지들은 더럽고 축축한 것, 끈적거리고 냄새 나는 것, 조용하고 느린 것을 좋아한다. 밝고 깨끗하고 따뜻한 건 질색이다.
즐기는 놀이나 취미도 깔끔떨이들이 질색할 만한 것들이지만, 작은 일에 기뻐하고 낙담하는가 하면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모습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이들은 밤이 되면 땅 위로 올라가 ‘깔끔떨이’ 인간들을 놀라게 한다.자는 아기 괴롭혀 울리기, 창문 덜그럭대기, 오밤중 집안에서 쿵쿵 발소리내며 돌아다니기 등등.
그 중에도 곰팡씨의 장기는 자는 사람 목에 부스럼 만들기다. 하지만 평소 괴물딱지들은 한없이 얌전하고 온화하다. 낚시할 때 물고기가 잡히면 상처를 받을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운동경기를 할 때도 서로 이기지 않으려고 할 만큼 경쟁심이 없다.
책 내용은 곰팡씨의 하루다. 어둠이 내리자 곰팡씨는 썩는 냄새 진동하는 침대에서 빠져 나와 진흙치약으로 이빨을 닦고(?), 거울을 보면서 “어찌하여 그대 모습 이리도 흉측한가”라고 흐뭇해 한다.
욕실 용품은 명품 고름, 진흙 치약, 방귀 오물 등이다. 하수구표 식빵과 티눈 플레이크, 배가 살살 기생충 등으로 식사를 하고, 밤새 식초에 담가두어 지린내 풍기는 젖은 바지를 입고 일하러 나간다. 새벽녘 퇴근길에 술집에 들러 친구들과 한잔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소시민의 일상이다.
이 책은 심술궂은 농담이자, 지독한 풍자다. 더러운 것을 전면에 내세워 깨끗한 것만 좋아하는 상식을 엎어버린 것은 일종의 저항이다. 틀린 인용을 일삼으며 유식한 척 폼을 잡고, 문학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실은 악취를 즐기려고 구린내극장을 찾는 괴물딱지들은 허위에 찬 인간의 모습을 조롱한다.
그런가 하면 독창적인 작품이라곤 하나도 없는 괴물딱지 나라의 ‘다가져가’ 도서관은 인간이 이룩한 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통렬한 반성을 촉구한다.
이 책에 무게를 더하는 또 하나의 중심 추는 곰팡씨 개인의 고민이다. ‘왜 나는 괴물딱지인가’ ‘사람들을 겁주고 부스럼을 만들고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고 묻는 곰팡씨를 통해 우리는 새삼 각자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오미환기자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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