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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 중국출신 佛작가 샨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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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 중국출신 佛작가 샨사 바람

입력
2004.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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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탁자에 새겨진 바둑판들도 수천 번을 오간 수담(手談)에 닳아 이젠 얼굴들이, 생각들이, 기도들이 되어버렸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 프랑스에서 소설을 쓰는 샨사(32)는 그의 세 번째 소설 ‘바둑 두는 여자(현대문학 발행)’를 이렇게 시작한다. 이 도도한 문장으로 한 소녀의 성장과 사랑을 담아냈다.1930년대 일제치하 만주의 한 작고 오래된 도시. 소녀는 익명의 바둑꾼들이 모이는 쳰훵광장에 앉아 있다. 그 곳은 그녀의 놀이터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다.

이 조숙한 소녀는 한 무리의 반체제 대학생을 만나 어른들의 낡은 봉건의식에 반항하듯 관능적 사랑에 빠져들고, 이내 삼각관계의 긴장을 즐기기까지 한다. 이 당돌한 사랑이 배신을 당할 즈음 광장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지만, 그녀는 그가 민심 염탐꾼으로 투입된 일본군 장교라는 사실을 모른다.

천황을 위한 죽음만이 삶의 의미로 알고, 사랑 역시 ‘탄창을 비우듯 사정하는 동물적 욕망’으로 알던 그는 소녀와의 수담을 통해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깨달아간다.

둘의 영혼은 바둑판 위에 던져지는 흑백의 돌의 떨림처럼 운명적으로 교유하지만 “에워싸는 전투인 바둑처럼 고통을 질식시켜 없앨 것”이라던 행복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바둑은 기만의 게임이다. 오직 하나의 진실, 바로 죽음을 위해 온간 허상으로 적을 포위해야 한다.”

샨사는 역사에서 소설의 얼개를 빌어오지만, 사실(史實)이란 인간본질이 벗어놓은 허물일 뿐임을 그의 데뷔작 ‘천안문(북폴리오 발행)’을 통해 일찌감치 말한 바 있다.

‘천안문’은 1990년 천안문사태 학생지도자를 추적하는 한 군인이 그가 남긴 일기와 메모를 통해 인간영혼의 자유에 대한 근원적 열망을 이해하게된다는 이야기다. “저는 이제 갑니다!… 더욱 높은 산꼭대기까지, 천상의문에까지 다가가렵니다.

거기서 대지를, 산들을, 강물과 대양을 바라볼 겁니다.”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는 피냄새 배고 절규 서린 천안문 광장과 도망자의 길을 덮어, 한편의 격조 있는 성장소설로 읽힌다.

당(唐) 고종의 황후이자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측천무후(현대문학 발행)’는 역사에 서사를 많이 기댄 대신, 문체적 성숙미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그의 측천무후는 우리가 아는 냉혹한 야심가나 사특한 정염의 권력자가 아니라, 절대권력을 넘어서서 영적인 세계를 추구한 완성도 높은 한 인간이다. 훗날의 여황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상상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달들, 불투명한 세계, 어르렁거림, 돌풍, 지진… 나는 장님이었다.”

‘바둑…’에서 맛만 보였던 관능의 문체는 이 소설에서 광기에 가까운 열락의 헐떡임으로 치닫는다. 삶과 죽음, 영광과 파멸의 극단을 가르는 갈림길인 생식과 출산, 생각하고 행동하는 꽃들이 벌이는 사투 같은 사랑은 극열과 허무의 경계를 오간다. “날렵한 뱀장어 같은 그녀의 손가락을 느끼자마자 나의 무의식적인 헐떡임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소설에는 ‘피’의 맺음 조차 비웃는 ‘피’ 맺힌 암투도 이어지지만, ‘성’의 전개에서야 생기를 얻는다. 만년의 여황제는 생존과 권력에 종속된성이 아닌 ‘성’ 자체로서의 성을 알게 되지만 육신은 하루가 다르게 메말라 간다.

그는 반문한다 “인간은 왜 여성의 아첨꾼이자 형리인 거울을 발명했을까? 천상의 아름다움을 아는 내가 왜 지상의 내 얼굴을 필사적으로 관리하는가? 해방을 갈망하면서도 왜 형벌을 선택하는가?”

한 인터뷰에서 샨사는 문장과 관련해 “진주들만 남도록 끝없이 낱말들을 줄이려는 결벽증이 있다”고 했다. 그의 문학에 프랑스가 주목하는 것은 동양의 형이상학적 오락(바둑)이나 절대권력의 지밀(至密)공간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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