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적(敵)이 사라진 시대의 증후군이고 다른 하나는 성찰적 근대성 이론이다. 1995년에 발표된 저서이고 독일과의 차이도 간간이 느껴지지만,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여전히 유효한 맥락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책을 펼쳤다.적이 사라진 시대의 증후군이란 탈냉전시대에 찾아온 몸살과 같은 혼돈을 말한다. 울리히 벡에 의하면 냉전의 논리가 지배했을 때 서유럽은 오히려 평온했다고 한다. 공산독재라는 적의 존재가 분명했고, 적과 맞서기 위해요구된 내부의 규율과 통제가 외견상 질서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종ㆍ지역ㆍ종교 등과 관련된 분쟁들이 계속되는 냉전 이후의 시대가 카오스적인 상황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느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서유럽의 국가들은 사라진 적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적을 안팎으로 찾아 나서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할까. 적이 사라진 시대라고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적이 희미해진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국제정세나 외교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존폐논쟁은 적이 희미해진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문제는 적이 희미해지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과는 달리 우리사회의 담론에서는 적 개념을 적대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논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로 대변되는 정치지형에서 상대방을 절대적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자주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적 개념은 사회를 이분법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대립적인 상황을 고착화시켜서 사회의 변화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야 할 적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고방식일 것이다.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또다른 맥락은 성찰적 근대화 이론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근대화란 과거와 전통에 대한 합리화 과정을 의미한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로 산업사회의 가치와 규범에 따라 전통적인 삶의 방식들을 재편성해왔다. 이제는 “산업사회가 역으로 하나의 ‘전통’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을 던질 때가 되었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에서 산업사회의 제도들은 역사적 토대를 잃어버리고 모순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가치혼란과 세대갈등을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산업사회가 근대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위험요소들을 성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국사회에서 산업사회의 약속들은 꿈결처럼 잊혀진 지 오래이다.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기대감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불안으로 대체되고, 평생직장의 소박한 꿈은 평생실업의 가능성 앞에서 악몽으로 바뀌었다.
스위트 홈의 조건이었던 일부일처제는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부터 의심받는 상황이고, 민족ㆍ계급ㆍ가족 등의 집단적 정체성의 권위 역시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자명해 보이던 인생의 절차도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모든 자명한 것들이 증발해버린 것 같은 상황을 혼돈이라고만 보아야 할까. 오히려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모순들을 성찰하고 조정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적이 희미해진 시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흑백논리적인 이분법부터 근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위험요소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합리화 과정을 다시 합리화하고, 민주주의를 다시 민주화하기 위한 성찰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인 태도가 이분법의 논리를 다양성의 차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한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