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개봉작 리스트엔 두 명의 이른바 ‘작가 감독’이 보인다. 김기덕과 왕자웨이. 영화만 놓고 본다면 거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지만, 둘 다 유럽에서 환영 받는 아시아 감독이며 꾸준히 자신의 비전을 발전시켜가고 있는 아티스트들이다.데뷔 8년만에 열 한 번째 영화를 내놓은 김기덕 감독은 ‘빈 집’에서 도시의 유목민을 보여준다. 주인공 태석(재희)은 빈 집들을 골라 하루하루를 기거한다. 그는 마치 그 집의 주인처럼 행동한다.
고장 난 기계가 있으면 고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한다(기념사진 찍기도 빠트리지 않는다). 빈 집인 줄 알고 들어간 어느 집. 태석은 선화(이승연)라는 여자를 만난다. 멍 투성이 얼굴로 방 한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태석과 함께 집을 뛰쳐나간다.
완전히 바뀌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빈 집’은 기존의 김기덕 감독 영화와는 사뭇 다른 질감을 전한다. ‘빈 집’은 독특하면서도 생소한 웃음의 영화다. 두 배우는 대사는 거의 없이(태석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선화는 단 두 마디만을 한다) 마임처럼 연기를 전개하는데, 무단침입이라는 ‘불법적’ 상황이 주는 긴장감과 결합해 의외의 효과들을 빚어낸다.
이런 낯섦이 조금씩 적응될 즈음에, 이 영화는 서서히 로맨스로 변해간다. 그리고 감독은 사랑의 고통보다는 위로의 과정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들이 함께 올라간 체중계의 눈금은 0을 가리키고, 남자는 여자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된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랑이야기 ‘빈 집’. 이 가을에 만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빛깔의 멜로 드라마다.
왕자웨이(王家衛)의 여덟번째 영화 ‘2046’은 매혹적인 매너리즘의 세계다. 그의 영화를 빠지지 않고 봐온 관객이라면,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외엔 큰 새로움을 느끼지 못했을 ‘2046’을 채우는 건 왕자웨이 특유의 익숙한 화법이다. 장만위(張曼玉)는 여전히 수리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양차오웨이(梁朝偉)의 내레이션은 끊임없이 흐른다.
감성적 울림이 강한 사운드트랙은 여전하며, 등장 인물들은 홍콩을 떠나거나 홍콩으로 돌아온다. 감독은 여전히 시간이라는 화두에 집착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살아간다. 그리고 감독은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한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주인공 차우(양차오웨이)가 겪는 혹은 (소설로) 쓰는 네 개의 사랑 이야기가 맞물리듯 얽혀 있는 ‘2046’에서, 왕자웨이 감독은 여전히 어긋난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읊조리는 이 영화엔, 과거 왕자웨이 영화에 희미하지만 항상 어른거렸던 ‘사랑의 희망’은 없다.
호텔 2047호에 앉아 2046호를 바라보는 주인공은, 옛사랑의 그림자를 잊지못하며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듯 보인다. 과거 ‘왕자웨이 월드’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던 열혈 관객들이 다소 늘어지며 동어반복적인 ‘2046’의 사랑 이야기에도 만족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월간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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