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회장의 결단은 엄청났다. 말이 1조원이지 얼마나 큰 돈인가. 1990년 당시 대졸 기술자 연봉은 1,000만원을 밑돌았다. 1년에 10만 명은 먹여살릴 수 있다는 얘기다.이런 돈을 10년간 투자하겠다니 포철과 한국을 위해 정말 큰 일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뤄낼 기회가 드디어 왔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나는 박 회장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서 김호길 포항공대 총장에게 부탁했고 김 총장과 함께 박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광양제철소가 완공되면 포항종합제철은 1년에 2,00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한다. 세계 시장규모로 볼 때 더 이상의 제철 시설은 필요 없다. 포철은 해마다 2조원 정도 투자해 왔다.
앞으로는 투자 여력이 더 커진다. 때문에 새로운 사업이 필요하다. 철강이산업의 꽃이라면 통신은 미래 정보산업의 꽃이다. 포철은 2000년까지 현재철강 산업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을 정보산업에서도 확보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과감히 투자하겠다. 그런데 포철 내부엔 정보산업을 잘 아는사람이 없다. 이 박사가 투자전략을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열의를 느끼면서 틀림없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섰다. 박 회장이 포항공대를 설립하고 아낌없이 지원한다는 사실을 김 총장을 통해 나는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포철은 물론 우리나라를 위한 훌륭한 결단이다. 나 또한 이 일을 간절히 원해 왔다. 전력을 다해 한번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면담이 끝나자 포철 직원이 내게 보수와 지위에 대해 물었다. 나는 “보수는 한푼도 필요 없다. 해외 출장비와 해외 컨설턴트 채용 비용만 주면 된다. 보수가 없는 만큼 직함은 고문 정도가 적합할 것 같다”고 말했다.
포철에서는 63빌딩에 번듯한 사무실을 마련했다. 한강이 보이는 근사한 장소였다. 곧바로 나는 포철 직원 1명과 포항공대 교수 한 사람을 데리고 미국 출장 길에 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과 인텔의 앤디 그로브 회장, 그리고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스콧 맥릴리 회장을 만났다. 또 DEC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유수 회사에 우리의 의도를 설명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워 하면서 기꺼이 협력할 뜻을 보였다.
그런 다음 샌디에이고에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반도체, 통신 등 정보 산업의 이름난 컨설턴트를 모아 전략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실정과 컴퓨터 산업의 미래를 감안해 포철이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하는가가 주제였다.
나는 또 서울사무소에 똑똑한 전문가 4,5명을 채용하고 미국에서는 정보산업의 주요 기술과 마케팅 분야에 정통한 컨설턴트와 계약을 맺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짤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포철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사업에 대해 소신을 갖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해결책은 박 회장이 단호하게지시를 내려주는 길 뿐이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민정당 의장이 된 다음 너무 바빠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갔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박 회장은 정치적으로 실각했다. 그는 포철을 떠나 일본에 머물게 됐다. 그래서 이 일은 자연히 중단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었다. 박 회장을 만날 때면 그사업이 중단된 게 무척 아쉽다고 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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