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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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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은행나무

입력
2004.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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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은행이 행인의 발길에 짓밟혀 껍질째 으깨지면서 내는 냄새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한여름 아침 출근길의 음식물 쓰레기 냄새 못지않은 괴로움을 줄 만하다.냄새만이 아니다. 은행이 떨어져 으깨진 자리에는 검은 얼룩이 오랫동안 남는다. 특히 하얀 화강암 보도 블록에 남은 자국은 마구 버린 껌처럼 환경 미화원을 괴롭힌다. 서식 환경이 나쁜 도시의 가로수로 심긴 은행나무는 번식 본능에서 유난히 자잘한 열매를 많이 맺는다.

■ 은행나무를 탓할 일이 아니다. 은행나무만큼 착한 나무도 드물다. 공해에 강해 자욱한 자동차 배기가스 가운데서도 멋지게 자란다. 다른 활엽수와 달리 해충에도 강해 독한 농약을 칠 필요도 없다.

노랗게 물든 가을의 잎은 도시인의 메마른 정서에 잠시나마 윤기를 주고,초여름의 푸른 잎은 모세혈관 장애, 노인성 치매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징코라이드 등의 유효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동의보감이 ‘폐와 위의탁한 기운을 씻는다’고 했듯 열매의 효능도 다양하고,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술안주로도 일품이다.

■ 암나무는 빼고, 수나무만 심으면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암수 구별이 쉽지 않고, 자연스러운 번식을 인위적으로 막을 일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심어서 손자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고 ‘공손수(公孫樹)’라는 별명도 붙었지만 요즘에는 몇 년이면 굵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품종도 개발됐다.

알이 작은 재래종 은행나무를 키우는 과수원도 있고, 농촌의 사찰이나 학교가 다른 작물처럼 은행나무를 ‘밭떼기’로 넘겨 현금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문제는 열매가 땅에 떨어져 불쾌한 냄새를 풍기도록 내버려두는사람들이다.

■ 은행나무를 시수(市樹)로 정해 놓은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 가로수나 관상수로 심어진 은행나무가 많다. 제대로 열매를 수확한다면 적지 않은 돈을 만들 수 있다. ‘은행 털기’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나무 아래 눈이 가는 그물을 치고 나뭇가지를 두들겨 얼마든지 깔끔하게 수확할 수 있다.

은행열매를 줍느라 교통사고 위험을 무릅쓸 일도 없다. 그 돈으로 노숙자등에게따스한 손길을 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오랜 지구의 역사와함께 목숨을 이어 온 은행나무의 참뜻인지도 모른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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