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 1986년 10월14일 당시 제1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 소속 의원 유성환이 국회에서 한 발언이다. 1960년 5ㆍ16 군사반란의 주모자들이 이른바 혁명공약 제1조로 내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는 지상명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을 뿐아니라,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두꺼울 대로 두꺼워진 극우반공체제의 갑각(甲殼)에 제도정치권 차원에서 구멍을 낸 파격이었다.전두환 정권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신민당 의원들이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이틀 뒤인 16일 밤 국회부의장 최영철은 집권 민정당 소속 의원들만 따로 모아놓고 경호권을 발동한 뒤 체포동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유성환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1992년에야 대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국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국민 전체의 의사로 결정된 국정의 근본 방침’이라고 풀이돼 있다. 일본어 ‘고쿠제(國是)’를 그대로 옮겨쓰고 있는 말이 분명하다. 국가주의적 냄새가 물씬 배어나오는 이 말을 그대로 쓴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다소 순하게 풀이해보자면 ‘한 사회를 떠받치는 근본적 가치나 원리’ 정도가 될 듯 싶다. 그럴 때 대한민국의 국시는 뭘까?
반공이 국시가 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반공이라는 가치나 세계관이 허접해서가 아니라 그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성환의 주장대로통일이 국시가 돼야 할까? 외세에 의한 분단 이래 통일은 대다수 한국인들의 염원이었지만, 이 염원을 떠받치는 민족주의역시 한 사회의 근본적 가치나 원리가 되기에는 폭이 여전히 좁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의 국시는 헌법 제1조가 천명하고 있는 민주주의ㆍ공화주의가 돼야 할 것 같다. 반공이나 통일은 그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뜻을지닌 가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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