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안에 전자계산기 국산화 연구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연구실 하나 만드는 데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인텔이 고밀도집적회로(LSI)를 세상에 내놓은 후 무려 6년이 지난 76년 6월에야 문을 열수 있었다. 연구원도 10명에 불과했다.본격적인 국산 컴퓨터 개발을 위해 필요한 연구비도 제대로 얻어낼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고의 마이크로컴퓨터를 생산할 수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별 반응이 없었다. 정부는 물론 KIST에 있는사람들도 듣기에 황당한 이야기였을 지 모른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은 내 주장이 옳았음이 판명됐다.
내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940년대 후반 주전산기 산업이 일어나자 미국의 내로라하는 전자회사들이 거의 모두 컴퓨터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제너럴일렉트릭(GE)과 RCA 등 전자산업의 거인이라고 불렸던 기존의 대기업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오직 컴퓨터를 위해 태어난 신생 전문 기업들만이 성공했다. IBM과 UNIVAC 등이 대표적 예다.
산업의 역사를 볼 때 이는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60년대 들어 미니컴퓨터가 세상에 나왔을 때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주전산기에서 자리를 잡아 대기업이 된 IBM같은 회사는 미니컴퓨터 산업에서 초기에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반면 미니컴퓨터 만을 위해 탄생한 DEC(Digital Equipment Corp) 등은 대박을 터뜨렸다.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출현으로 70년대에는 새로운 마이크로컴퓨터시대가 열리게 될 게 분명했다. 나는 마이크로컴퓨터 산업도 똑 같은 경로를 밟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꿔 말하면 주전산기와 미니컴퓨터에서 세계를 휩쓴 기존 회사들이 아니라 이 분야를 위해 새로 탄생하는 전문 기업들만이 성공한다는 얘기다. 이름없는 벤처 기업이 새로 일어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고 믿었다.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본격적으로 투자해 제대로 된 전문 기업을 만들어보자는 게 내 전략이었다.
그래서 정부와 연구소에 이 같은 역할을 KIST에서 해내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나는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나는 미국과 일본 등에서 어느 회사가 마이크로컴퓨터 만을 위한 새로운 전문 기업이 될 지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미국에서 MITS라는 회사가 알테어(Altair)라는 마이크로컴퓨터를 내놓았고, 임사이(IMSAI)는 자기 회사 이름을 딴 임사이라는 컴퓨터를내 놓은 게 전부였다. 둘 다 직원이 10명 안팎인 작은 회사였다.
게다가 임사이와 알테어를 직접 사 보았더니 제대로 된 기능 조차 갖추지못한 컴퓨터였다. 동호인들이 취미로 가지고 놀 장난감 수준이었다. 만약100명의 연구원을 얻어 본격적으로 개발하면 세계 최고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내 생각은 지금 생각해도 옳았다고 본다.
그때 허송세월 한 게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세계 최고의 마이크로컴퓨터 제조국가라는 지위를 대만에 내주고 말았다.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성공한 최초의 전문 기업은 애플컴퓨터였지만 우리가 예정대로 일을 진행했다면 애플을 앞섰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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