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폐인의 하루/베르너 엔커 글·그림·이영희 옮김 / 열린책들 발행 8,500원-(늘 술에 절어있는) 프랑크: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지? 자동차도 없고 전화도 없고…
-(축 늘어진) 하로: 그래서 대부분 죽었지 뭐.
-프랑크: 가정생활은 어떠니?
-하로: 주지(그의 동거녀)는 언제나 잘하려고 하지만…늘 용서가 없어.
낙서 같은 엉성한 그림에 등장인물들의 몇몇 대사만 읽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이 책을 외면하지 못한다. 출판사들이 신간에 끼워주는 언론 평은 뭉텅 에누리해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단번에 독자의 넋을 빼놓고 멍청한 무기력 상태에 빠뜨린다’(독일의 타게스슈피겔)는 식의 상찬에 수긍이 간다.
1960년대 독일의 영화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으로 날렸던 베르너 엔케의 만화 ‘행복한 폐인의 하루’(열린책들 발행). 그는 68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까지 한 영화 ‘자기야, 본론으로 들어가자’ 등의 영화에서 황당하고 재치 있는 화법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았던 노장이다.
이번 책은 80년대 중반 영화계에서 은퇴한 그가 5년여 간 만들어 지난해 불쑥 내놓은, 일기 같은 만화다. 책에서 그는 게으른 사색가 하로의 생활을 통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의 행복을 웅변한다.
하로의 무위(無爲)에 참다 못한 주지가 싸움을 건다. “하느님 맙소사”에대한 하로의 대답은 “그렇게 높은 사람을 자꾸 부르지 마”다. “멍청한개XX”라는 욕에는 “착한 동물한테 욕하지 마.” 그는 결국 쫓겨난다.
하로가 이사한 곳은 변두리 공동묘지 앞. 프랑크가 묻는다. “너 왜 이리로 이사 왔니?” “사람에겐 전망이 있어야 해.” 어떤 날의 일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로 끝나기도 하고,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던 어느 날에는 침대 속에서 생각한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자는 속도를 늦춘다.’ 곡절 끝에 주지는 하로를 다시 받아들이지만 바가지는 이어진다. “너는 도대체 믿을 수 없어!” “내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언제나 네 곁에 있잖아” “어서 일어나” “벌써 오늘이야?”
책에는 정치 거물과 문인, 경찰, 사업가 등도 등장해 잔잔한 에피소드를 만들지만, 이들은 대개 희화화의 대상이다. 일상 탈출을 감행하지 못한 채 하루에도 수십 번 일탈을 꿈꾸는 이들이나 게으르고 느리다는 핀잔에 주눅든 이들, 혹은 그런 삶을 동경하는 이라면 하로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볼 일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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