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에 情報化가 있다행정 전산화는 1988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프로젝트는 82년부터 3년이 넘는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우리는 정부 각 부처의 여러 사람을 만나 사업 추진 방식을 설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85년 말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 든 뒤에는 직원들과 각 프로젝트를 맡은 용역 회사들이 새로운 방식을 배워가면서 프로그램을 짜느라 무진 애를 썼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과 그에 따른 고통은 이 자리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
고통과 인내가 클수록 그 열매는 달콤한 법이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를 뒤돌아보면 감회가 새롭다. 사람들은 으레 성공 가능성이 높고 위험은 적은 일을 좋아한다. 일을 진행하면서도 쉽게 해낼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1987년 5월 행정 전산화 첫 작품인 취업 알선 시스템 개통식에서 이헌기(오른쪽 세번째) 당시 노동부 장관 등이 시험 운영을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이 나다.
그런데 나는 굳이 힘들고 어렵고 위험천만한 길을 택했다. 이런 선택은 나 혼자만의 고생과 책임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나와 함께 일한 수 많은 기술자와 연구원들에게도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를 지원해 준 정부의 몇몇 분들에게도 무거운 짐과 책임을 나눠 지게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왜 그래야 했을까. 나는 “그 가시밭길은 정보화 사회를 구축해야 하는 역사적인 시점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기술자들이 짊어져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업을 맡을 때 나는 오 명 체신부 차관에게 “내가 최선이라고 택한 방법은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자리(사장)에 연연하면 용감하게 추진할 수가 없다. 이 일을 맡되 임기(3년)를 한번만 채운 뒤 끝내겠다”고 말했다.
오 차관은 “이 박사의 추진 방식이 나라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믿고 적극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오 차관은 체신부 공무원들이 인사청탁을 하거나 업무에 간섭하는 일을 모두 막아주었다.
역시 예사로운 분이 아니었다. 보통 공무원 같으면 나를 위험 인물로 여겨 “제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 보라”고 말렸을 터이다. 나는 오 차관 덕분에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된 기간은 3년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를 정보화 사회로 이끄는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고 믿는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부 전산화(e_Government)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델로 인정 받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정부의 모든 부처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통신 및 데이터베이스에서 동일 표준을 쓰고 있다. 한 마디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일돼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 등의 구매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됐다. 부처와 부처 사이는 물론 부처와 민간의 정보교환도 원활해서 엄청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원스톱 대민 서비스가 가능하고,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각종 정부 자료를 찾아볼 수 있게 된 것도 행정 전산화의 큰 소득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임기를 한번으로 끝내지 못했다. 1기 임기가 끝날 즈음인 85년 말 당시 체신부 장관인 김성진 박사가 강력하게 사임을 말렸기 때문이다.
김 장관은 “일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데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2기가 끝났을 때 나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제 그만둘 때가 왔다. 후회는 없다”고 선언했다. 물론 서운함도 남았지만 명예로운 퇴진이라고 생각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