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제작돼 전두환 정권 시절 불법 테이프로 나돌던 김민기씨의 노래굿‘공장의 불빛’이 정식 앨범으로 나온다고 한다. 80년대 초 연세대 앞의 어느 서점에서 그 테이프를 하나 사 잠자리에서 되풀이 듣곤 했던 기자로서도 감회가 새롭다.그리고 70~80년대 민중예술의 고전이라 할 이 작품이 아직까지 햇빛을 못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요즘 세상에 정부가 못 내게 했을 것 같진 않고, 김민기씨가 좀 무심했던 듯 싶다.
혹시라도 옆집에 소리가 새나갈세라 이어폰을 꽂고 듣던 ‘공장의 불빛’이나 ‘이 세상 어딘가에’ 같은 노래들을 오랜만에 읊조리노라니 가슴이뭉클하다.
시대의 궁핍함이 예술적 풍요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은 70~80년대의 한국 민중가요에 꼭 들어맞았던 것 같다. 유신정권이나 5공화국의 폭압이 없었다면, 김민기씨의 ‘공장의 불빛’이나 김종률씨의 ‘님을 위한 행진곡’, 문승현씨의 ‘사계’ 같은 노래들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예술의 풍요라는 요행수를 바라고 시대를 억지로 궁핍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이런 노래들은 그 시대가 압제자의 전유물만은 아니었음을, 허송된 세월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 시대는 압제에 맞서는 시민적양식의 시대, 역동적 저항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이 노래들은 말하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예술이라면, 그 몸뚱어리 어딘가에 시대의 흔적을 새기지 않을수 없다. 위에서 거론한 노래들도 그렇다. ‘공장의 불빛’이나 ‘이 세상 어딘가에’처럼 투명한 비애를 깔고 있는 노래만이 아니라, 행진곡 풍의 ‘님을 위한 행진곡’에도 시대의 아픔은 깊이 각인돼 있다.
도입부의 경쾌함 덕분에 노래방 레퍼터리로까지 진출한 ‘사계’에도 잔업ㆍ야근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애환이 스며 있다. 기자는 특히 이 ‘사계’를 좋아하는데, 이 노래의 가인으로 설정된 노동자가 제 슬픔을 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를 굳이 드러내 보이지 않는 이 대범한 노래는 그자체로 시대의 상처다.
기자는 언론사 생활을 막 시작하던 80년대에 책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 민중가요가 담긴 불법 테이프를 사기 위해 대학 주변 서점들을 어슬렁거렸다. 그 시절 그런 테이프를 통해 알게 된 노래 가운데 전세계 노동자들의 성가라 할 ‘인터내셔널’도 있다.
‘인터내셔널’은 1871년 파리 코뮌이 무너진 뒤 체포를 피해 은신하고 있던 외젠 포티에가 가사를 쓰고 노동자 출신 작곡가 피에르 데게이테르가 곡을 붙인 노래다. 여기서 ‘인터내셔널’은 1864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주도로 런던에서 결성된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을 가리킨다. 멜로디가 매우 단순해 누구라도 한두 번 들으면 따라 부를 수 있다.
미적 세련과는 거리가 있는 노래지만, ‘인터내셔널’은 그 뒤 노동과 자본이 맞서는 전선마다 힘차게 울려 퍼지며 세계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운동가요가 되었다.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리스트 존 리드의 생애를 그린 워렌 비티의 영화 ‘레즈’(1981)를 본 독자라면,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던‘인터내셔널’을 기억할 것이다. 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통령 당선으로 프랑스에 사회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좌파 유권자들은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와 함께 ‘인터내셔널’을 불렀다.
타고난 반공주의자인 기자는 ‘인터내셔널’의 세계관, 곧 19세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천년왕국적 세계관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리에서, 극장 무대에서, 민주노동당 집회장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타고난 무신론자로서 기독교의 천년왕국적 세계관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 기자가 거리에서, 극장 무대에서, 이런저런 ‘구국기도회’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꾹 참고 살아왔듯 말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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