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공부하면서도 크게 흥미를 못 느끼는 15세 소년이 있었다. 그렇다고 뚜렷이 하고싶은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연기를 하고 싶어졌고, 잘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난생 처음 생긴 성취욕은 강한 추진력을 만들어주었고, 그날 이후 머리 속이 온통 연기생각으로 가득 찬 소년은 3년 후 MBC 드라마 ‘산’에서 감우성의 어린시절 역을 맡으며 배우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소년은 드라마 ‘학교2’ ‘우리 집’에 출연해 끊임없이 얼굴을 알렸으며, 2000년에는 영화 ‘해변으로 가다’로 스크린 신고도 마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카메라 앞에서 사라진다. 김기덕 감독의 ‘빈집’으로단번에 주목을 받게 된 재희가 이현균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했던 과거다.
탄탄대로는 아니었지만 꽤 순탄한 길을 걸어가던 그는 자진 ‘휴업’을 했다.
자고 나면 새 별이 뜨는 연예계에서는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다.“연기생활을 오래 하고 싶은데 어렸을 적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이 싫었어요.” 주변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2년간이나 카메라를 피해 다녔고, 지난 시절과 단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7년 데뷔했으니 만 7년. 녹녹치 않은 연기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이유다.
김기덕 감독은 ‘빈집’을 채울 남자 주인공을 물색하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재희의 얼굴을 보고, TV단막극 촬영현장을 직접 찾았다. “눈빛이 마음에 들으셨대요. 10분 정도 대화하고 출연하겠다고 했죠.”
대학교 1학년 시절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 작법 특강을 들었던 재희는 이미 그때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배우를 많이 배려해주시는 분이에요. 작업진행을 빨리 해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편한 분이죠.”
대사 없이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 했다. 그러나 감정을 포장하는 말을 없애고 나니, 오히려 인물의 심리상태가 더 담백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오래 되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재희의 눈빛 연기에 반한 올해 베니스영화제는 남우주연상 후보 세 명중 하나로 그의 이름을 올렸다. “상 못 받아 서운하냐고요? 후보에 오른 것만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죠.”
요즘은 쏟아지는 출연 요청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의 이름을 내걸고 투자자를 모으는 경우가 있을 정도. “주위 분들 의견을 들으며 다음 작품을 신중히 고르고 있어요.” 아무리 늦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는 다음 작품을 결정할 계획이다. “좋은 영화, 좋은 배역이라면 다 하고 싶어요. 그리고어떤 힘든 역할이라도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될래요.”
재희는 무채색의 ‘빈 집’ 같은 배우다. 어떤 배역이든 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훌쩍 떠나도 그는 따스하게 끌어 안아주고, 또 다른 배역이 다가오면 기꺼이 받아들일 얼굴이다. 그의 포부가 기대되고, 그의 다짐을 믿고 싶다.
/라제기기자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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