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키려 했던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가 다시 11월 로 넘어갔습니다. 이번 국감에서 또 한차례 여야간 논리 접전이 예상됩니다.가장 큰 쟁점이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 폐지 여부입니다. 이 문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국민의 정부 시절 때부터 제기돼 온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와 재계간 자존심 대결의 상징처럼 돼 버렸습니다. 재계가 수년째 목숨 걸고 폐지하려는 속내와 공정거래위원회가 부처의 존립을 걸고 지키려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자총액제한제를 도입한 이유
재벌체제의 부정적 측면 때문입니다. 재벌 계열사들은 지분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한곳이 위태로워지면 다른 곳도 위험해 집니다.
굴지의 재벌이 통째로 쓰러진 것도 출발은 계열사 한두곳이었습니다. 또 복잡한 출자관계는 불투명 경영의 진원지이기도 합니다.
출자관계가 ‘A사→B사→C사→D사→A사’ 식으로 되면 총수는 A사만 장악하면 B, C, D사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적은 돈(지분)으로 전권을 행사하면서도, 계열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적인 책임을 면하게 되죠.
이런 출자고리 하나하나를 제도적으로 끊어내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재벌 계열사들이 다른 회사 주식을 살 수 있는 출자총량을 제한하는 출총제가 등장한 것이죠. 자산총액 5조원 이상 재벌 소속 계열사들은 자기 회사 순자산의 25%를 초과해 다른 회사 주식을 취득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여야가 대판 다투는 까닭은
폐지론과 유지론의 논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최근 한 TV 토론회에서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사이에 오갔던 논쟁 일부를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김정호: 기업이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이유는 실물투자나 지배권 행사를 위한 것이다. 당장의 급한 투자는 예외조항 확대로 (출총제가) 크게 장애가 안된다.
문제는 경영권 방어이다. 계열사 출자를 통한 의결권 행사가 막혀 있어 현금을 비축해 자사주를 소각하는 값비싼 방어수단이 사용되고 있다.
유시민: 경영권 위협은 몇몇 기업에 국한된 문제다. 소수 기업 때문에 폐지하는 것은 맞지 않다. 경영권 방어가 문제된다면 기업이 정부와 협의해서 국민경제에 민폐 안 끼치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유승민: 기업경영이 상당히 투명해졌고 주주들의 견제도 많아졌다. 특히 이번 개정안은 각종 예외로 누더기가 된 규제를 더 완화하자는 것이다. 제도의 실효성이 상실됐다. 그럴 바에야 폐지해야 한다.
유시민: 누더기라도 입고 있는 것이 벗고 있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핵심은 경영권 방어에 대한 시각차
김정호 원장 말대로 재계가 출총제 폐지를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투자에 걸림돌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은 현재 일부 기업들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삼성은 최근 부채비율이 100% 이하로 떨어져 한시적으로 출총제를 졸업했는데, 삼성물산이 경영권 위협을 받자 삼성SDI를 통해 물산 지분을 늘렸습니다.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지난해 소버린은 출총제를 악용, ㈜SK의 경영권을 노렸습니다.
㈜SK는 당초 외국인투자기업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SK 계열사들의 ㈜SK 지분에 의결권이 보장됐는데, 소버린은 자기 주식 일부를 우호세력에게 넘겨 외투기업에서 제외되려 했던 것이죠. 결국 재계 주장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출총제를 폐지, 계열사들이 서로서로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공정거래위의 시각은 좀 다릅니다. 출총제를 폐지하면 대주주가 적은 지분으로 계열군단을 지배하는 현상이 심화해서 불투명성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기업가치도 하락, 오히려 M&A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SK 사태도 총수지분이 적고 경영도 불투명해 주가가 하락한 것이 1차적 원인이라는 입장입니다.
또 ㈜SK 경영권만 얻으면 다른 계열사들 지배권도 덩달아 얻을 수 있는 취약한 소유구조도 문제였다고 진단합니다. 특히 M&A 위협은 경영자 감시라는 순기능이 크다는 점을 중시하죠.
◆뿌리는 오너경영에 대한 이견
양쪽의 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적으로 오너경영에 대한 시각차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정위의 논거에는 사실 오너경영체제가 지주회사체제나 독립경영체제로 전환하지 않는 한 지배구조의 투명성은 어렵다는 시각이 깔려 있습니다.
회삿돈(계열사간 출자)이 대주주 개인의 지배권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이런 시각 때문입니다. 반면 재계는 오너경영체제라고 무조건 나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총수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장기 투자가 가능할 뿐더러, 기업가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반도체강국, 자동차강국도 이런 시스템에 기인한다는 겁니다.
유병률 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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