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10월4일 오스트리아 정치가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텍싱에서 태어났다. 그는 총리로 재직하던 1934년 7월25일 관저를 습격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암살됐다. 나치당원들의 이 쿠데타 기도는 이내 진압됐고 돌푸스의 후임으로 법무장관 겸 교육장관 쿠르트 폰 슈슈니크가 취임했으나, 히틀러가 지배하는 나치 독일 바로 옆에서 오스트리아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돌푸스와 히틀러 사이의 불화는 이념적 불화가 아니라, 국가 주권 차원의 불화였다.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 소속으로 총리가 된 뒤 다른 우익 정파·민병대와 함께 조국전선을 꾸려 정부를 이끌던 돌푸스는 히틀러와 여러 모로 닮은 데가 있었다. 돌푸스는 파시스트 독재자였고, 좌파 정당 사회민주당을 불법화했다. 그는 아예 의회를 해산하고 포고령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히틀러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돌푸스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총통 히틀러가 바라는 대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 나라의 합병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불법화해 히틀러의 비위를 건드렸다. 돌푸스가 바란 것은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식의 파시스트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 긴밀히 협력했다.
돌푸스의 죽음을 초래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 기도는 그 직전 사회주의자들의 실패한 봉기로 오스트리아 정정이 어수선한 틈을 탄 것이었다. 돌푸스의 후임 슈슈니크는 전임자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탈리아의 지원으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히틀러의 눈치를 본 이탈리아가 딴청을 부림으로써 오스트리아의 고립은 점점 심화되었다. 돌푸스가 죽은 지 네 해 만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요청으로 독일군이 오스트리아에 진주하면서 두 나라의 합방(안슐루스)이 선언됐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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