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척추암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하느님 정말 너무하시네요"라고 소리쳤었다. 소아마비로 한평생 고통과 불편을 겪고 있는데 또 암이라니, 그것도 3년 전 유방암 수술에 이어 다시 찾아 온 암이라니, 정말 하느님 왜 그러시는 걸까.고통 속에 정제된 투명한 글로 우리의 마음을 따듯하게, 또 서늘하게 적셔주는 한 아름다운 작가가 왜 또 병마에 시달려야 할까. 지금까지 주신 고통으로 다하지 못한 신의 뜻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건가.
추석연휴에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장 교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한 신문에 연재하던 '장영희의 문학의 숲'이란 칼럼을 끝내며 자신의 투병에 대해 밝혔고, 쾌유를 비는 독자들의 편지가 빗발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묵은 신문들 속에서 그의 칼럼을 찾아 읽었다. '문학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써내려 간 그의 글은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뜨거운 튀김 거죽을 입힌 얼음과자처럼, 빙하에 덮인 용암처럼, 뜨거우면서 차갑고, 차가우면서 뜨거운 글이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 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이 계획들이 다 성사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는 말로 그는 글을 시작하고 있다. 신은>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입원한 지 3주 째, '생명'을 생각하면 끝없이 마음이 선해지는 것을 느낀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마음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 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 칼럼을 접으려고 한다. 언젠가 이 칼럼에서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는 포크너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글이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그 많은 시련을 주시나요. 그렇게 열심히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을 또 쓰러뜨릴 건가요"라고 내가 신에게 외쳤던 분노를 그는 이렇게 감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느님 너무 하시네요"라고 원망하는 대신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라고 여유 있게 말문을 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망 분노 이기심 절망 집착 등 원색적인 감정에서 한 단계 올라가 더 넓게 깊게 아름답게 세상을 보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문학이다.
온 나라가 시끄럽고 어둡게 느껴지는 이 가을, 장영희 교수는 암과 싸우며 문학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용기와 사랑, 인간다운 삶, 치열한 투쟁과 승리를 가르쳐주는 문학의 힘을 잊지 말자고 한다. 그의 말로 이 세상은 갑자기 눈부시게 찬란해 진다.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장영희씨의 아버지인 장왕록 선생님이 떠오른다. 우리 세대는 6·25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선생님이 번역하신 펄 벅의 소설들을 읽으며 자랐다. 선생님은 서울대 교수로 가기 전 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1950년대 후반 서울을 방문했던 펄 벅 여사를 이화 교정에 초청하셨던 생각이 난다. 세계적인 작가와의 만남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설레는 경험이었던가.
오늘 세상이 이처럼 삭막한 것은 문학의 부재 때문이다. 작가와의 만남에서 가슴 설레는 소년 소녀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금 인터넷에는 장영희 교수의 '승리'를 비는 네티즌들의 글이 흘러 넘치고 있다. 인터넷이 모처럼 문학의 향기에 젖고 있다. 장 교수가 빨리 병마를 물리치고 독자들과 함께 '문학의 재건'에 힘을 모으기를 빈다.
장명수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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