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식품에 독극물을 투입하는 범죄는 1980년대에 유난히 기승을 부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83년에 발생한 이른바 ‘서울 을지병원 독극물 사건’이다.입원환자 염모씨가 아들이 건넨 우유를 마시고 숨진 데 이어, 청산가리가든 요구르트가 병원 공동취사장, 화장실 등지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20명을 더 희생시키겠다”는 섬뜩한 협박 메모도 함께 발견됐다.
결국 보험금을 노린 희생자의 아내가 겨우 열한 살짜리 어린 아들을 꼬드겨 벌인 범행으로 밝혀졌지만 그때까지 병원 환자와 가족들은 난데없는 불안과 공포로 전전긍긍해야 했다.
■ 이듬해 말에는 유명회사의 라면, 과자에 독극물을 넣어 돈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또 한번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해 초 일본 열도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은 모리나가 제과 협박사건의 영락없는 재판(再版)이었다.
다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없었으나 가게에서 이들 제품을 사 먹으려다입 안에 화상을 입거나 심한 복통, 고열을 겪은 피해자는 여럿이었다. 이후 유사한 독극물 범죄가 80년대 내내 꼬리를 물었다.
■ 그러고 보면 요즘 대구시민들을 온통 불안에 떨게 하고있는 달성공원 ‘살인음료’ 사건은 10여년 만의 재현인 셈이다. 애꿎은 피해자가 벌써 10명을 훌쩍 넘었다.
대부분 공원 벤치에 멀쩡하게 놓인 음료수를 별 생각 없이 마신 어린이와노약자들이다. 동일회사의 음료수에, 발생장소가 모두 같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 심지어 범인의 요구조건이나 메시지조차 없다.
그러니 혹 결정적인 목격자나 주변인의 신고가 없는 한 범인 검거는 아무래도 여의치 않을 듯 싶다.
■ 문제는 ‘아무나 죽어도 좋다’는 의식이다. 범죄 심리학상 이런 유형의 범행은 극도의 사회적 소외감과 그로 인한 무차별적 적개심의 발로이다. 겨우 한 사건을 갖고 호들갑을 떠느냐고 힐난할 일은 아니다.
얼마 전 유영철이 저질렀던 연쇄살인 행각도 그렇고, 또 최근 전례 없이 급증하는 자살에 깔린 기본 정서도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지난 80년대는 여러 가지로 암울한 시대였으니 그랬다고 치자. 그런데 이런 류의 범죄가 왜 하필 다시 지금인가.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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