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닷새가 징글맞은 이에게, 혹은 번잡한 명절치레 들무새 노릇에 지쳤거나, 푸진 휴식을 께느른한 일상이 아닌 쨍쨍한 지적 유희로 채우고 싶은 이에게 권할만한 소설 두 권이 나왔다. 묵직한 익살의 블랙 코미디 ‘곤두박질’과 역사추리소설 ‘4의 규칙’이다.
●곤두박질(마이클 프레인 지음,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발행)
안식년을 맞은 철학강사 클레이는 책 저술에 몰두하기 위해 미술사가인 아내와 시골 별장으로 떠난다. 사건은 그 동네의 속물적인 지주 토니 처트가이들 부부를 식사에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소더비 등 미술품 경매회사를 사기꾼 집단으로 아는 처트는 그가 소장한 몇몇 그림들의 값어치를 클레이 부부를 통해 가늠해 좋은 값에 팔겠다는 계산. 하지만 처트의 속셈을 아는 부부로서는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이 초대가 영 떨떠름하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만만찮은 식견에다 미술사가가 될 욕심까지 있는 클레이는 그 집에서 굴뚝의 검댕을 막는 칸막이로 쓰이고 있는 그림 한 점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화가의 서명은 없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 브뢰겔의 작품! 그의 계절 연작 가운데 한 점이라고 클레이는 확신한다.
그는 이 사실을 처트 부부에게는 물론이고, ‘때때로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한’ 아내에게조차 발설하지 않는다. 클레이는 처트를 적당히 속여 그림을 가로채기로 하고, 그 궁리와 함께 그림의 진위여부 및 미술사적 가치에 대한 연구를 은밀히 시작한다.
작가는 클레이가 브뢰겔의 사라진 연작 작품의 수나 작품 거래과정 등을 추적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과, 예술적 열정과 돈에 대한 탐욕 사이의 갈등,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 등을 통해 그의 해박한 미술사적 지식과 당대의 정치ㆍ사회적 이해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하지만 책의 묘미는 시종 이어지는 익살스럽고 철학적인 문장에 있다. 처트의 식사초대를 받은 클레이가 자조적으로 내뱉는 한마디. “드디어 지주계급과 어울리게 되었군. 근거 없는 우리의 좌경적 편견을 버리는 거야. 순간적 타락이지.”
● 4의 규칙(이안 콜드웰등 지음, 정영문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발행)>
1499년 출간된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라는 저자 미상의 희귀 고서가 있다. 여러 언어로 쓰여진 데다 다루는 분야 역시 광범위하고 난삽해 그 의미 판독을 두고 내로라 하는 석학들이 잇달아 좌절한다.사이렌의 마력을 지녀 한번 빠져들면 미궁 속처럼 헤어나오기 힘든 이 책의 해독에 프린스턴대학 졸업반인 천재 청년 폴과 화자인 톰 등 동기생 몇이 덤벼들게 되고, 그 과정에 드러나는 대를 이은 음모와 암투, 사랑, 갈등이 소설의 큰 줄거리다.
그 음모와 갈등은 책의 탄생 비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상스 정신의 산실이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위대한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지배계급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의 문화적 탄압, 그 와중에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처한 그리스, 로마 이후의 방대한 지적 재산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신세에 놓인다. 결국 문제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며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소포클레스의 희곡,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보티첼리의 그림 등 아예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500년전의 비밀’을 감춘 암호문이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소설은 고대와 중세 르네상스기의 언어학과 예술, 건축, 철학, 문학의 업적들을 종횡무진하는 문예사를 망라하고 있다. 르네상스시대 피렌체의 분위기나, 프린스턴대 수재들의 학교생활과 사랑이 병렬적인 서사로 얽혀 소설적 재미를 더하고 있다. 두 젊은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원작의 우둘투둘함을 번역ㆍ편집을 통해 공들여 다듬었다는 후문. 번역을 맡은 소설가 정영문 씨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계보에 놓일 대중적인 소설이면서 폭 넓고 깊이 있는 교양적 요소가 이야기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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